●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작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번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랬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두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은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물푸레나무 /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푸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 책을 태우다 / 김명인
내다 버릴 곳도 마땅찮아 책들 태워 구들 덥힌다
홑 창호를 뚫고 밤새도록 혹한 파고든 고향 집
책장이나 찢어 군불 지피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불길이 옮겨붙는지 활자의 파란 넋들이
일어났다 주저앉는다 스러지고 스러지는
저 아궁(我窮) 속의 어떤 학습은
캄캄한 미로를 헤맸으나 굴뚝 없는 구들이었으니
매운 연기로 가득 찼으리라 생각이 드는 오늘 아침
불길이 넘기는 영문 원서는
책보다 먼저 타오른 큰형님 유품이리라
곁불에 찌드는 도형은 육지의 항해술로 파선한
작은형의 좌표고 크레파스 그림일기는
부도를 내고 피신한 아우네 조카들 일과겠지만
여기 어느 책갈피도 들춘 적이 없어 나는
실패한 형제들의 교과서를 찢어 불길 속에 던져 넣는다
책을 태워 온기를 얻으려니 평생
문자에 기대 여기까지 온 나의 분서갱유가
우스꽝스럽다 반면(反面) 핥는 불꽃이
비꼬는 혀들 같다 노모의 성경책까지 함께 사르니
교과서 구할 길 없이 친구의 책 훔쳤던
중학교 1학년짜리 오래된 아픔까지 겹쳐 너울거린다
저 잿더미 속으로 스러지는 활자
누구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리니
학습이란 태워 올리는 불길일까, 타고 남은 잿더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