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친구야 혼자서 가라 최금진,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같은 부대 동기들 김승일, 가을의 기도 김현승 (2019.05.16)

푸레택 2019. 5. 16. 15:40

 

 

 

 

● 친구야, 혼자서 가라 / 최금진

 

속편하게 가라.

느타리버섯 같은 암 세포가

네 항문을 다 파먹고 이미 내장에까지 뿌리내렸다니

자식걱정, 와이프 걱정 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한민국 육군하사답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진격하듯이

그렇게 가라.

나이 서른여덟이면 피는 꽃도 지는 꽃도 아니지

스무 평 전세 아파트와

현금 이천만원 남겼으면 됐지

가늘게, 가늘게라도

네 외아들에게 원주 전씨 24대를 넘겨줬으면 됐지

아프다고 돌아누워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병실 문을 쾅 닫고 돌아서서 나온 것처럼

미련 두지 말고

그깟 생명보험 하나 못 들어둔 거

입을 거, 먹을 거, 다 못 누렸다고 원통해하지 말고

저 밤하늘에

곰팡이 포자처럼 둥둥 떠서

혼자 가라.

주섬주섬 짐을 싸서 이사 다니던 그날처럼

저승길 외롭다고 누굴 데려갈 생각 말고

돌아보지 말고

살아서 지겨운 가난,

너 혼자, 너 혼자서, 다 끝내고 가라.

 

● 그립다는 것은 /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수 없다는 뜻이다

볼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 같은 부대 동기들 / 김승일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텐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지은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게 많아지겠지?

앞으로 들어올 후임들한테, 무슨 죄를 지을지 계획하면서. 우리는 정신없이 웃고 까분다.

 

웃고 까부는 건 다 좋은데. 성사를 장난으로 생각하진 마.

우리가 방금 나눈 대화도 다음 성사 때 고백해야 돼.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동기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고.

역시 독실한 종교인은 남다르구나.

너는 오늘 무슨 죄를 고백했는데? 우리는 조금 빈정거렸다.

 

나는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하거든.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라서.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팔다리를 잡고 간지럼을 태웠는데도.

너는 절대 고백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겁이 났다. 저 독실한 신자 녀석이.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 가을의 기도(祈禱)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