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80여 편 중 시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
● 봄꽃들 / 문성해
진달래나 홍매화나 박태기 같은 꽃들
마술사가 피워낸 조화인 양 자꾸 손이 가게 된다
분명 가지는 어제 보던 회초리로 쓰기에도 뭣한 가지인데
탱탱해진 젖꼭지나
잔뜩 충혈된 목젖 같은 꽃들이
잎사귀도 하나 없이 직설법으로 매달려 있다
삽십년 전 내가 살던 동네에도 꼭 그런 꽃들이 있었으니
그 꽃들만 떴다 하면
엄마들은 자식들 건사하느라 바빴으니
학교도 중퇴하고
몇 명씩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되바라진 것들이
그 애들 들락거리던 만화가게나 분식점은 화사한 욕설로 넘쳐났으니
눈 깜짝할 새
구겨진 치마도 매만지지 않고 골목에서 사라지던
말만한 그 꽃들처럼
나도 한때는
침을 찍 뱉으며 내가 좋아하던 이층집 그 아이에게
불쑥 꽃을 피우고픈 나이가 있었으니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고독과 그리움 / 조병화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한들 당신은 너무나 먼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보다는 쓸쓸한 것이 더 많고,
즐거움보다는 외로운 것이 더 많고,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더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행복한 일보다는 적적한 일이 더 많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땐 한정없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이러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그립습니다.
참아야 하겠지요.
견디어야 하겠지요.
참고 견디는 것이 인생의 길이겠지요.
이렇게 칠십이 넘도록 내가 아직 해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독'입니다.
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순수한 고독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로 무서운 병은 고독입니다.
그 고독때문에 생겨나는 '그리움'입니다.
'고독과 그리움',
그 강한 열병으로 지금 나는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는 '고독과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작품으로 치료되어 왔는지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그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그리움',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독과 그리운 사연'을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세월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에 대한 내 이 열병 치료는
오로지 '고독과 그리움'을 담아 보내는 이 나의 말들이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생겨나는 이 쓸쓸함,
이 고통이 나의 이 가난한 말로써 먼 당신에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만분지 일이라도.
어지럽게 했습니다. 난필(亂筆)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많이 늙었습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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