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감동수필] 파초(芭蕉) 이태준, 풍란(風蘭) 이병기 (2019.05.04)

푸레택 2019. 5. 4. 15:06

 

● 파초(芭蕉) / 尙虛 이태준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芭蕉) 한 그루를 사왔다. 얻어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 뿌리에서 새로 찢어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 볼 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설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저윽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오고야 만 것이었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 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요 생선 씻은 물, 깻묵 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그런 것이 올여름에도 그냥 그 기운으로 장차게 자라 지금은 아마 제일 높은 가지는 열두 자도 훨씬 더 넘을 만치 지붕과 함께 솟아서 퍼런 공중에 드리웠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큰 파초는 처음 봤군!" 하고 우러러보는 것이다. 나는 그 밑에 의자를 놓고 가끔 남국의 정조(情調)를 명상한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珠簾)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 위에까지 비는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오늘 앞집 사람이 일찍 찾아와 보자 하였다. 나가니

"거 저 큰 파초 파십시오."

한다.

"팔다니요?"

"저거 이전 팔아 버리서야 합니다. 저렇게 꽃이 나온 건 다 큰 표구요, 내년엔 영락없이 죽습니다. 그건 제가 많이 당해 본 걸입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보는 날까진 봐야지 않소?"

"그까짓 인제 둬 달 더 보자구 그냥 두세요? 지금 팔면 올엔 파초가 세가 나 저렇게 큰 건 오 원도 더 받습니다…… 누가 마침 큰 걸 하나 구한다뇨 그까짓 슬쩍 팔아버리시죠."

 

생각하면 고마운 말이다. 이왕 죽을 것을 가지고 돈이라도 한 오 원 만들어 쓰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얼른 쏠리지 않는다.

"그까짓거 팔아 뭘 허우."

"아 오 원쯤 받으서서 미닫이에 비 뿌리지 않게 챙이나 해 다시죠."

그는 내가 서재를 짓고 챙을 해 달지 않는다고 자기 일처럼 성화하던 사람이다.

나는, 챙을 하면 파초에 비 맞는 소리가 안 들린다고 몇 번 설명하였으나 그는 종시 객쩍은 소리로밖에 안 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 오후에도 다시 한번 와서

"거 지금 좋은 작자가 있는뎁쇼……."

하고 입맛을 다시었다.

 

정말 파초가 꽃이 피면 열대지방과 달라 한번 말랐다가는 다시 소생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당에서, 아니 내 방 미닫이 앞에서 나와 두 여름을 났고 이제 그 발육이 절정에 올라 꽃이 핀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가 한번 꽃을 피웠으니 죽은들 어떠리! 하물며 한마당 수북하게 새순이 솟아오름에랴!

 

소를 길러 일을 시키고 늙으면 팔고 사간 사람이 잡으면 그 고기를 사다 먹고 하는 우리의 습관이라 이제 죽을 운명의 파초니 오 원이라도 받고 팔아 준다는 사람이 그 혼자 드러나게 모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무심코 바람에 너울거리는 파초를 보고 그 사람의 눈을 볼 때 나는 내 눈이 뜨거웠다.

"어서 가슈. 그리고 올가을엔 움이나 작년보다 더 깊숙하게 파주슈."

"참 딱하십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갔다.

 

● 풍란(風蘭) / 이병기

 

나는 난(蘭)을 기른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에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讀書), 작시(作詩)도 하고, 고서(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境地)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 해 여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광복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또 6․25 전쟁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養士齋)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盆)을 주었고, 고경선(高敬善)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 웅란(雄蘭)․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霍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 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었다. 방렬․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玲瓏)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玉)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烟)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阮堂) 선생이 한묵연(翰墨緣)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계수 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귀(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古書)도 없고, 난(蘭)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