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미루나무 공광규,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신현림, 농무(農舞) 신경림 (2019.05.14)

푸레택 2019. 5. 14. 10:14

 

 

 

 

 

 

● 우리 동네 목사님 /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미루나무 / 공광규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서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의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엉엉 울거나 한 여름 사춘기처럼

잎새를 하염없이 반짝반짝 뒤집었지

미역 감던 아이들이 그늘에 와서 놀고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들을 기대어 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 것에도 못쓴다며 무시당했지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 갔던 나무

아주 오래오래 살다 천명을 받고 폭풍우 치던 한 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 신현림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 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칠칠대는 구나

보름달이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