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권정생, 군인을 위한 노래 문정희 (2019.04.30)

푸레택 2019. 4. 30. 11:13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
그렇게 어머니는 영원히 가셨다.
먼 곳 이승에다
아들 딸 모두 흩어두고 가셨다.
버들고리짝에
하얀 은비녀 든 무명주머니도 그냥 두시고
기워서 접어두신 버선도 신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훌훌 가셨다.

어머니 가실 때
은하수 강물은 얼지 않았을까
차가워서 어떻게
어머니는 강물을 건너셨을까
어머니 가신 거기엔 눈이 내리지 않는 걸까
찬바람도 씽씽 불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앞산 가득 뒤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어머니 사시는 집은 초가집일까
흙담으로 지은 삼 간 짜리 초가집일까
봄이면 추녀 끝에 제비가 집 지을까
봉당엔 삽살이도 앉았을까
둥우리엔 암탉이 병아리도 깔까

어머니는 누구랑 살까
이승에 있을 때
먼 나라로 먼저 갔다고
언제고 언제고 눈물지으시던
둘째 아들 목생이 형이랑 같이 살까
아침이면 무슨 밥 잡수실까
거기서는 보리밥에 산나물 잡수실까
거기서도 밥이 모자라
어머니는 아주 조금밖에 못 잡수실까

어머니네 집 앞으로 골목길도 있을까
대추나무 서있는 우물이 있을까
바가지로 만든 새끼끈 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길으실까
물동이도 고만큼 예쁜 것으로 길으실까
왕골껍질로 만든 또아리를 받치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팔이 여위셨을까
물동이 내리실 때 부들부들 떨지 않으실까

디딜방아는 누구랑 찧으실까
목생이 형이 찧고
어머니는 확 앞에 앉아서 쓸어넣으실까
수수가루 빻아
오늘 저녁엔 수수팥단지 만드실까
이남박에 꼭꼭 떡 담으시고
모락모락 김나는 수수떡 담아 놓으시고
저 아래 먼 먼 이승에 두고 온 일준이랑
또분이랑 생각하실까
수수팥단지 잡수시다 목이 메어 우실까
호롱불빛을 비껴나
어머니는 돌아앉아 눈물 닦으실까

참나무 떡갈나무 잎이 피면
꾀꼬리가 자랑자랑 숲속에서 울까
어머니는 꾀꼬리 소리 들으며
산나물 뜯으실까
췻동아리 뜯으시고
바디취나물 뜯으시고
뚝갈이, 미역취 뜯으시며
거기서도 어머니는 타령을 부르실까
꾀꼬리 우는 소리보다 더 구슬픈
타령을 길게 길게 부르실까

어머니 사시는 거기엔
전쟁이 없을까
무서운 포탄이 없을까
총칼을 든 군대들이 없을까
모든 걸 빼앗기만 하는 임금도 없을까
무서워서 하루도 한 시도
마음 못 놓는 날이 정말 없는 것일까
그래서 헤어지는 슬픔도 없는 것일까
정말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여름 뙤약볕이 쬐면
고추밭에 고추가 빨갛게 익을까
어머니는 목화밭 김도 매고
서속밭 김도 매며 바쁘실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쉬지 않고 일만 하실까
어머니 얼굴은 거기서도 까맣게 그으르셨을까
주름살이 깊게 깊게 패이셨을까

어머니는 열무랑 나박배추 가꾸실까
고추 따서 다래끼에 담고
열무랑 나박배추 솎아 담고
어머니는 언덕길로 걸어서 집으로 가실까
고무신 아끼시느라 벗어 들고 걸어가실까
다래끼 무거우면 한 번 추슬렀다가
- 휴유우 하시며, 잠깐 섰다가 또 걸으실까

소낙비 내린 다음 날
말똥버섯 돋아나면 따다가 잡수실까
쪽으로 짜개시고 끓는 물에 데쳐
국을 끓여 잡수실까
말똥버섯 국 끓여 놓고 앉아
- 일준아...
- 또분아...
그렇게 또 생각하실까

밤이면 달도 뜰까
둥글게 훤하게 달도 뜰까
앞마당 귀리집으로 엮은 거적을 깔아 놓고
어머니는 삼바람 이으시며 밤을 지샐까
누구랑 앉아서 삼 삼으실까
거기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도
진갑이네 어머니 같은 착한 이웃이 있을까
감자떡 나눠 잡수시며 걱정들을 나누며
함께 앉아 삼 삼으시며 밤을 지샐까

하얀 달빛에 실바람이 일고
초가지붕 위엔 박꽃도 필까
누나 얼굴 같은 하얀 박꽃이 필까
조롱조롱 애기박이 열리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오는 걸까
바가지가 둥글둥글 굵어지는 가을이 오는 걸까
어머니는 사기요강에 오줌 받아
박넝쿨 구덩이에 부어 넣으실까
바가지 딴딴하게 영글라고
오줌 받아 부으실까
바가지 타서 말리시며
어머니는 시집간 귀분이 생각하실까
친정나들이 오면 제일 이쁜 것 주고 싶어
거기서도 어머니는 딸 생각하실까
거기서도 추석은 있을까
설날이 있을까
어머니는 추석에도 외로우시겠지
어머니는 설날도 외로우시겠지
아직도 아들딸 이승에 두고 가셔
어머니는 문구멍까지 귀 기울이시며
눈물지으실까

어머니는 거기서도
바람머리 앓으실까
이앓이도 하실까
머리도 수건 두르시고
아픈 것도 애써 참으실까
겨울밤 어머니 방엔 군불 많이 지피실까
솜이불 두꺼운 걸로 덮고 주무실까
방바닥엔 삭자리 깔았을까
짚자리 가지런히 깔았을까
윗목에 물레실 자으시다가
어머니는 밤늦게 잠자리 드시는 걸까

어머니 사시는 나라에도
그리움이 있을까
애달픔이 있을까
개똥벌레 날아가는 밤
귀뚜라미 우는 밤도 있을까
정지 부뚜막에 생쥐가 찍찍 울며 다닐까
뒷산에 부엉이가 와서 울까

장날이면 장보러 가실까
말린 고추 팔러 가실까
울양대 차좁쌀도 고만큼씩
올망졸망 가지고 가실까
동구 밖까지 삽살이가 따라오면
어머니는 주먹을 들어 으르시고
발로 탕탕 구르시고
그래도 안 되면
- 삽살아, 집에 가 있거라
- 집 잘 보고 있으면 착하지
삽살이는 알아듣고 못 이긴 척
서운하게 돌아서 텁썩텁썩 갈까

장에는 어떤 장수들이 있을까
개구리참외도 팔까
콧등에 하얀 테 두른
알룩고무신도 팔까
타래엿도 팔고 갱엿도 팔까
소금 장수도 저런 고등어 장수도 있을까
때깔이 예쁜 주발 장수도
항아리랑 단지랑 놓고 파는
옹기장수 할아버지도 있을까

어머니는 뚝배기 하나 사고
소금 조금 사고
개구리참외도 사실까
참외 사시면서도 이승에 두고 온
아들딸 생각 또 하시겠지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도 내릴까
소낙비 내리면 무지개도 뜰까
청산 위에 색동빛 예쁜 무지개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도
청산처럼 아름다운 산이 있고
중들 강물처럼 맑은 강물이 흐를까
거기 그렇게 예쁜 무지개 뜨면
어머니도 어린애처럼 즐거우실까
소낙비 맞고 옷이 젖어도
어머니는 무지개 쳐다보면 또 쳐다보며
비탈길을 동동걸음 걸어오실까

개구리참외는
목생이 형이랑 둘이서만 먹을까
거기서도 어머니는 찔름 들어간
못생긴 참외를 잡수시고
예쁘고 만난 건 아들 주실까
참외꼭지만 남기고 알뜰히 잡수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하늘 보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달 쳐다보실까
거기엔 정말 전쟁이 없었으면
빼앗아만 가는 임금도 없었으면
전쟁에 쫓겨 쫓겨 가지 않았으면
모구가 자유롭고 사랑이었으면
톳제비나 물레귀신 말고는
무서운 것들이 없었으면
거기에도 봄이면 진달래꽃 폈으면
꾀고리가 울었으면
골목길에 엄마닭이 병아리 데리고 다니고
감나무에 족두리 같은 꽃이 폈으면
창포꽃이 피고
그네 뛰는 단오날이 있었으면

응숙이네 머슴, 장수 아저씨랑
군마 할아버지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살았으면
송아지도 있고 망아지도 있었으면
실개울엔 가재도 살고 우렁이도 살고
버들가지도 흔들리고 물총새도 날고
흰구름 동동 뜨고 제비가 날고
뻐꾸기가 자꾸자꾸 울었으면
아아, 거기엔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으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보리밥 먹어도 맛이 있고
나물 반찬 먹어도 배가 부르고
어머니는 거기서 많이 쉬셨으면
주름살도 펴지시고
어지러워 쓰러지지 말으셨으면
손목에 살이 좀 오르시고
허리도 안 아프셨으면
그리고 이담에 함께 만나
함께 만나 오래 오래 살았으면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 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 동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지식산업사, 1988)

 

[감상]

언젠가 수십 광년의 거리인 태양계 밖에서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넘어 지구별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끼리 따로 한 살림 오붓하게 차려 살고 있진 않을까란 공상을 한 적이 있었다. 권정생 선생과 그 어머니의 이승에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시를 읽으면서 내 공상도 활기를 띄어 내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도 이랬으면 하고 바랬다. 아직 그 나라로 건너가시는 중일지도 모르겠고 전입신고를 채 마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늬로 오래오래 사시다가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권정생 선생의 섬세한 애정이 구구절절 배어있어 이오덕 선생 말씀마따나 '무조건 감동적'이다. 선생 자신도 9년 전 5월 17일 ‘보리밥 먹어도 맛이 있고’ ‘나물 반찬 먹어도 배가 부른’ 그곳으로 떠나가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그러면서 오래오래 잘 살고 계실 것이다. 김용락 시인이 당시 임종을 지킨 뒤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돌아가시기 직전 선생님은 산소호흡기의 고무호스가 꽂힌 입을 움직여 무언가 맹렬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입모양은 ‘어메’였습니다. 그 ‘어메’ 소리를 2~3분간 안간힘을 쓰면서 지르시더니 더 이상 입모양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신 뒤 조탑리 이웃들은 세 번씩이나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혼자 골골하게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유명 동화작가라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걸 보고 놀랐고, 지병으로 고생하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여운 노인인 줄 알았는데 연간 수 천 만원씩의 인세수입이 있는 분이란 사실을 알고 다시 놀랐으며, 그렇게 모인 10억 원이 넘는 재산과 앞으로 생길 인세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조목조목 유언장에 밝혀 놓으신 걸 보고 또 놀랐다는 것이다. 선생은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며 인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 이 시대의 성자셨다.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선생의 유언 중 일부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스물다섯 살쯤에 스물 두세 살의 처녀와 벌벌 떨지 않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행여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신다면 꼭 그러시길 바란다. 내 어머니도 내 아버지보다 조금만 더 마음씨 착한 남자 만나서 하고 싶은 그림 그리며 속 하나도 안 썩이는 딸 아들 하나씩 다시 낳아 진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권순진

 

● 군인을 위한 노래 / 문정희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이땅의 젊은 남자들은

누구나 군사분계선으로 가서

목숨을 거기 내놓고 한 시절

형제라고 부르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절박하게 고통과

그리움을 배운답니다

그래서 이땅의 여자들은

소녀 때는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고

처녀 때는 군대로

면회를 간답니다

그 시차 속에 가끔 사랑이

엇갈리는 일도 있어

어느 중년의 오후

다시 돌아설 수 없는 길목에서

군복 벗은 그를 우연히 만나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속으로 조금 울기도 한답니다

서로의 생 속에

군사분계선보다 더 녹슨

어떤 선을 발견하고

슬퍼한답니다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의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감상]

 

군인은 한때 ‘군바리’였다. 군인은 장교와 직업군인에게나 통용되는 신분호칭이었다. 적어도 내가 군대생활 할 때까지는 그랬고, ‘이등병의 편지’가 목청껏 불리어지고 탈영과 총기사고가 멈추지 않는 한 어쩌면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나도 성탄절이 가까울 무렵 치약과 칫솔, 알사탕과 비스킷 따위가 들어있는 위문대를 받고서 잠시 환하게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한 여고생의 위문편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를 읽고서 일부러 막사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본 기억도 있다. 하지만 소녀를 동경하거나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연애편지 하나를 알고 있다. 그 편지를 처음 읽은 건 중 2때 집안에 뒹굴던 <世代>라는 과월호 잡지(1964년 9월호로 추정)에서였다. 당시 하급공무원인 아버지가 정기구독하며 쌓아놓기만 한 책이 뒤늦게 심심한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권말에 실린 <캄캄한 무덤에 잠들게 하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 형식을 빌린 소설에서의 편지글 12통이다. 그 편지는 서울 문리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에 다니다 입대한 최영오(1938년~1963년) 일병과 그의 애인 이화여대생 장현숙이 주고받은 것으로 최영오가 부대 내의 선임병사 2명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애인이 보내온 연서를 선임병 2명이 번번이 가로채 먼저 뜯어보고 내무반원들 앞에서 낄낄거리며 공개적으로 조롱하자, 최 일병은 소원수리를 통해 이를 항의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나 되레 구타를 당했다. 이후에도 심한 모욕과 부당한 기합에 시달리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1962년 7월 7일 저녁 사단사령부에서 열린 위문공연을 본 후 내무반으로 들어오는 정 모 병장과 고 모 상병을 향해 M1방아쇠를 당겨 살해한 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최영오가 명문대 재학생이란 사실과 발단이 된 그 연애편지 내용의 일부가 공개됨으로써 낭만적 호기심을 부추긴 것이다.

 

군사법정에 선 최 일병은 “두 사람을 살해한 순간 나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인간 이하의 노리개처럼 갖고 노는 잔인함을 향해 총을 쏘았을 뿐”이라고 울부짖었으나 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한어머니회와 각계각층에선 구명을 위해 백만인 서명운동에 나섰고, 서울대 재학생과 백철, 박화성, 최정희 등 많은 문인들이 구명에 가세했으나 소용없었다. 상고심의 대법원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확정지었다. 당시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군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으므로 ‘군기 확립’의 서슬에 사회의 탄원은 먹혀들 수 없었다.

 

이듬해 3월 18일, 서울 근교 수색의 군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집안은 1987년 8월까지 용공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다. 최 일병은 죽기 직전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고 말했고, “제가 죽음으로써 비인간적인 우리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군대로 거듭나길 바랄 뿐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 일병의 사형은 급하게 집행되었다. 심지어 처형 3시간 전에 형인 최영수씨가 그를 면회했는데 “다음 면회 땐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사실로 미뤄보면 최 일병 자신도 3시간 뒤에 자신이 처형되리라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사별 한 뒤 20년간 홀로 행상을 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사체 인수 통지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아 그날 밤 늦게 한강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 평소 자주 빨래하던 마포강변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안에는 ‘높으신 선생님들, 내가 영오대신 가겠으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주세요’라고 적힌 유서가 들어 있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최 일병의 애인이었던 장현숙은 죄책감에 평생 독신으로 살고자 마음먹었고, 이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이대 측에선 자립기반 마련을 위해 문과대학에서 약학대학으로 전과토록 배려하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최영오 일병 사건을 다시 접한 것은 1976년 모 헌병대 수사과에서 졸병으로 복무할 때 우연히 열람한 사건기록에서다. 최영오 일병은 서울대 4학년 재학중 휴학하고 1961년 단기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보병 15사단 무반동총중대에 전입되어 복무하던 자원이었다. 당시 ‘學保兵’은 '학적 보유병'의 준말로서 60년대 초 조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인재들이 군복무를 빨리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제도이다. 군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던 당시에 절반인 1년6개월 만 복무하고 나머지 기간은 장기휴가 형식으로 제대시키는 제도로서 명문대 재학생들에게 준 엄청난 특혜였다.

 

최 일병 역시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에겐 못 배운 것도 한이었을 터인데, 그 특혜가 탐탁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들에겐 분명 ‘좆같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학보병들은 군 생활을 짧게 하는 대가로 고참병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어릴 때 잡지를 통해 읽고 느꼈던 최 일병 사건에 대한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솔직히 당시엔 희생된 병사들보다는 최 일병의 죽음에 동정과 안타까움이 훨씬 짙었다. 둘이서 주고받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연애편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맑게 개었습니다.” 식의 하늘과 별과 바람을 노래한 내용들이었다.

 

최 일병은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물론 연서로 인한 살인이 표면적인 동기인 것은 부인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살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이하의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다.”며 울부짖었다. 결국 죄를 개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느 일방의 잘못이기 전에 강제적 병역제도가 존재하는 한, 상관이 부하를 소유하고 부하는 상관에게 종속되는 ‘군바리’의 신분이 유지되는 한, 지금도 젊은이들은 그 속에서 신음하고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가 여러모로 좋아진 건 사실이다. 우리 때에 비하면 복무기간도 그렇거니와 구타도 거의 사라졌고 환경도 그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병장 월급은 ‘무려’ 40만원이 넘는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에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는 청춘들에게 당연한 개선이리라. 그럼에도 가장 연애빨을 받을 시기 이 땅의 남자들은 군바리로 ‘좆뺑이’치고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다. 그러다 더러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기도 했을 것이다. 반세기를 건너온 지금 우리는 똑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최 일병 때도 그랬고 우리 때도 교련 이수만큼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는 사병들은 그렇지 못한 고참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하기 힘든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병역특례문제만큼은 아무리 깊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 권순진

 

☆ 권순진 블로그《詩하늘 통신》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