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나무 조이스 킬머, 산벚나무가 왕벚나무에게 최두석, 윤판나물 김승기, 각시붓꽃을 위한 연가 복효근 (2019.04.19)

푸레택 2019. 4. 19. 23:09

 

 

 

 

 

 

 

 

 

● 나무(Trees) / 조이스 킬머(Alfred Joyce Kilmer)

 

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

허기진 입을 대지의 달콤한 젖가슴

깊숙이 묻고 있는 나무

온종일 잎에 덮인 두 팔을 들어올린 채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무

여름이 오면 머리 한가운데

울새 둥지를 이고 있는 나무

그 가슴에 눈이 내리면 쉬었다 가게 하고

비가 오면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 만들지만

나무는 하느님만이 만들 수 있다네.

 

TREES / Joyce Kilmer (1886~1918)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A poem lovely as a tree.

A tree whose hungry mouth is prest

Against the earth's sweet flowing breast;

A tree that looks at God all day,

And lifts her leafy arms to pray;

A tree that may in Summer wear

A nest of robins in her hair;

Upon whose bosom snow has lain;

Who intimately lives with rain.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 ​산벚나무가 왕벚나무에게 / 최두석

 

하산하여 저자로 간 지 오래인

나의 친척이여

요즘 그대 집안의 번창이 놀랍더군

일찌감치 화투장에

삼월의 모델이 될 때부터 알아보았네만

요즘은 사꾸라라고 욕하는 사람도 없이

지역과 거리의 자랑인 양 심어

축제를 열기에 바쁘더군

그대의 꽃소식 신문과 방송이 앞다투어 전하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네

지상에 사람들이 번성하는 한

기꺼이 그대 화사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세상의 곳곳에 전파할 걸세

 

나야 뭐 늘 굼뜨지 않나

새 잎 내밀 때 조촐하게 꽃피고

버찌는 새들이 먹어 새똥 속에서 싹트는

예전의 습성대로 살고 있네

일찍이 목판으로 책을 찍거나

팔만대장경 만들 때

세상에 출입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내 살 곳은 호젓한 산속이네

 

● 윤판나물 / 김승기

 

이젠 고갤 들어봐요

윤판(尹判) 대감의 고명딸 수줍은 영혼이여

무슨 일로 산골짝에서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다보고 있나요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굳이 나물이라고 이름 붙이는 건

등뼈 휘는 허기 달래던 한 때, 맛이 없어도

꽃으로만 보지 말라는 뜻이었나요

 

세상은 돌고 돌리는 윤판(輪板)

때로는 어질어질 멀미도 할 텐데,

그리 고개만 숙인다면

가슴 속 푸른 꿈은 언제 펼치려는 건가요

부끄럼타는 얼굴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게 부드러워요

꽃은 당돌하게, 화안한 웃음으로 피워야지요

외면의 눈길 거두고

마주 보며 옛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 각시붓꽃을 위한 연가 / 복효근

각시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 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시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시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시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