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어머니 기억 신석정,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2019.04.18)

푸레택 2019. 4. 18. 15:19

 

 

 

 

 

 

 

 

 

 

 

 

 

 

●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은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어머니 기억 / 신석정(辛夕汀)

 

비 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셨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 먼 바다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 고갤 넘던 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을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질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덕 없는 어머니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넋두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