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다시 목련 김광균, 목련 후기 복효근, 성탄제 김종길 (2019.04.18)

푸레택 2019. 4. 18. 10:38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다시 목련(木蓮) / 김광균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니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내리더니

목련은 한 잎 두 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 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 볼까

 

● 목련 후기 /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먼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거칠고 오래된 편지같은 아버지가 끈적한 피와 성탄제의 빛깔로 다가왔다. 삶이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깊게 패인 주름과 굵어진 손마디를 생각케 한다. 이제사 아버지의 함자를 입으로 나열하여 쏟아 본다. 그 이름으로 서늘하게 미어지는 산수유 피는 계절이 이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