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湖水) / 김동명
여보,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깊고 고요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별들은 반딧불처럼 날아와 우리의 가슴 속에 빠져주겠지
또,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맑고 그윽한 가슴을 가질 수 있다면
비애(悲哀)도 아름다운 물새처럼 조용히
우리의 마음 속에 깃들여 주겠지
그리고 또,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아름답고 오랜 푸른 침실(寢室)에 누울 수 있다면
어머니는 가만히 영원(永遠)한 자장 노래를 불러
우리를 잠들여 주겠지……
여보,
우리 이 저녁에 저 호수(湖水)가으로 가지 않으려오,
황혼(黃昏)같이 화려(華麗)한 방황(彷徨)을 즐기기 위하여
물결이 꼬이거던, 그러나 그대 싫거던
우리는 저 호수(湖水)가에 앉어 발끝만 잠급시다그려.
●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