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호수 김동명, 플라타너스 김현승, 선운사에서 최영미 (2019.04.16)

푸레택 2019. 4. 16. 22:09

 

 

 

 

 

 

 

 

 

 

 

 

 

 

 

● 호수(湖水) / 김동명

 

여보,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깊고 고요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별들은 반딧불처럼 날아와 우리의 가슴 속에 빠져주겠지

 

또,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맑고 그윽한 가슴을 가질 수 있다면

비애(悲哀)도 아름다운 물새처럼 조용히

우리의 마음 속에 깃들여 주겠지

 

그리고 또,

우리가 만일(萬一) 저 호수(湖水)처럼

아름답고 오랜 푸른 침실(寢室)에 누울 수 있다면

어머니는 가만히 영원(永遠)한 자장 노래를 불러

우리를 잠들여 주겠지……

 

여보,

우리 이 저녁에 저 호수(湖水)가으로 가지 않으려오,

황혼(黃昏)같이 화려(華麗)한 방황(彷徨)을 즐기기 위하여

물결이 꼬이거던, 그러나 그대 싫거던

우리는 저 호수(湖水)가에 앉어 발끝만 잠급시다그려.

 

●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