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내가 백석이 되어,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나타샤에게 안도현 (2019.04.17)

푸레택 2019. 4. 17. 13:09

 

 

 

 

 

 

 

 

 

 

 

☆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김영한

 

내 나이 어언 일흔 셋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내 생의 전부

내 가슴 속의 그리움은

쏟으려 해도 쏟기지 않는 물병

서러움만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오막살이

* 고조곤히: 고요히, 소리없이

 

●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구붓하고: 몸이 구부정한

* 모래톱: 넓은 모래벌판, 모래사장

* 지중지중: 곧장 나아가지 않고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

* 개지꽃: 나팔

*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셔, 눈이 시려

 

●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詩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그런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 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할 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 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에는 시를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에게 / 안도현

 

나타샤, 노란 은행잎이 마치 눈처럼 내리는 늦가을입니다. 은행잎들이 사라질 때쯤이면 그 자리에 또 눈이 내려 쌓이는 겨울이 오겠지요. 나는 나타샤, 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이름 뒤쪽으로 왠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고, 눈부신 허벅지의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을 것 같고, 당신이 홀연 나타날 것만 같아서 숨이 막힌답니다.

 

백석의 시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백석이라는 사내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도 백석처럼 가난했으나 내게는 아름다운 나타샤도 흰 당나귀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백석이 되어 보려고 혼자 쓸쓸히 앉아 눈 내리는 북방을 생각하며 밤새워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몇 날 며칠 술을 마셔대도 나타샤 당신은 오지 않더군요.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건 당신이 아름답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한 시인이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그려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은 흰 눈을 닮았을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거나 가까이 가슴에 품으면 금세 녹아 없어지는, 눈물이 되어 녹아버리는 당신은 혹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나타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백석은 당신한테 대체 어떤 사내였나요? 그는 일본 유학파에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이목구비가 준수한 모던보이였지요. 고향에서 세 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집을 뛰쳐나와 뭇 여인들을 안고 싶어하던 바람둥이기도 했구요. 그의 어떤 점이 당신을 홀리게 하던가요?

 

모르긴 몰라도 백석은 우유부단한 성품에 참으로 이기적인 사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여자 저 여자 다 찝쩍거리면서 서울로 함흥으로 만주로 떠도는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과 짧고도 뜨거운 연애를 했던 자야 여사는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직접 받았다 했고, 1938년 당시 '삼천리' 잡지 기자였던 소설가 최정희 선생은 백석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이 시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영 처녀 박경련과의 러브스토리도 공개된 적이 있지요. 과연 이 중에서 나타샤가 누구일까 하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지요.

 

나타샤,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는 그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여인들에게 이 시를 건네주며 사랑의 무기로 활용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이 시에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는 겁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 어쩌고저쩌고 하는 유행가풍의 사랑법을 일거에 격파하는 솜씨가 멋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

 

누군들 이런 목소리에 빨려들지 않겠는지요. 나타샤, 내 말을 서운하게 듣지 마십시오. 어쩌면 백석에게는 나타샤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많은 여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나타샤는 없는 게 아닐까요? 없기 때문에 또 모든 남자들은 나타샤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요?

 

●『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子夜 여사의 회고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의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의 히라다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 《당시(唐詩) 선집》 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 《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은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리 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의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 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소...'라는 식의 하루의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보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의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 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간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 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이 글은 이동순李東洵 시인이 자야 여사를 세 차례 방문하고 나서 그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쓴 백석에 관한 회고담 중의 일부분이다. 백석의 꾸밈없는 인간적 품성과 자상하고 섬세한 마음씨, 30년대 문우들과의 교우기 등과 함께 반백년을 넘어서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야 여사의 백석에 대한 끊이지 않는 그리움이 담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