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개망초 꽃 안도현, 그 때 정맹규 (2019.04.16)

푸레택 2019. 4. 16. 19:13

 

 

 

 

 

 

 

 

 

 

 

●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金顯承)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달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를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피로...

 

/ 시집 <절대고독> 1970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李相和)

 

지금은 남의땅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는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 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혼자 어께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찿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몸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 개망초 꽃 /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그 때 / 정맹규

 

젊은 시절 그 때

청춘이라 말하기도 하고

철없던 시절이라 말하기도 했던 때

날짜 지난 버려진 신문지처럼

참 할 일 없이 살기도 했지

 

대박같은 행운의 인생 선물받고

잘 견디며 여기까지 왔건만

날개 잘려나간 지금

청춘이라 불려졌던 그날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으랴

 

몸은 세월따라 끌려만 가는데

생각은 자꾸 뒤로 밀리는 슬픔

버려진 신문지 신세 같아도

그때를 추억하면 웃음꽃 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