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풀꽃과 놀다' 나태주, '화초와 잡초 사이' 복효근,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이준관,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이현주 (2019.04.19)

푸레택 2019. 4. 19. 23:00

■ 풀꽃과 놀다 / 나태주

그대 만약 스스로
조그만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풀밭에 나아가 풀꽃을 만나 보시라

그대 만약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 여겨진다면
풀꽃과 눈을 포개 보시라

풀꽃이 그대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조금씩 풀꽃의 웃음과
풀꽃의 생각이 그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 부디 지금, 인생한테
휴가를 얻어 들판에서 풀꽃과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 보시라
그대의 인생도 천천히
아름다운 인생 향기로운 인생으로
바뀌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 이준관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쑥부쟁이야, 너를 보니
모두들 소식이 궁금하구나
늙은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를 파고들던
달빛은 잘 있는가
전봇대에 오줌을 갈기던 개는
달을 보고 걸걸걸 잘 짖어대는가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에
올해는 유난히 감이 많이 열렸는가
볼때기에 저녁 밥풀을 잔뜩 묻히고 나와
아아아아 산을 향해
제 친구를 부르던
까까머리 소년은 잘 있는가

■ 화초와 잡초 사이 / 복효근

들꽃 화단에 꽃들 피었다
동자꽃 범부채 물레나물
토요일 봉사활동 시간
들꽃 화단에 잡초제거란다
왁자지껄 풀을 뽑는지 꽃을 뽑는지
국희야 혜림아
야야 그것은 잡초가 아니란다
야야 그걸 밟으면 어떻게 하느냐 지청구했더니
홍수가 한마디 한다
잡초하고 야생화하고 뭐가 달라요
평소 말썽만 피워 미움 바치던 녀석이 언제 그렇게 여물었냐
내가 할 말이 없구나
뽑아던진 쇠비름에도 노란 꽃이 맺혔구나
흔해빠진 달개비도 푸른 꽃이 훈장 같구나
그래, 무엇이 잡초고 무엇이 화초라더냐
이것은 해란초 이것은 풍선꽃
저것은 물레나물 저놈은 부처꽃
이놈은 인섭이 저놈은 기린초
엉겅퀴 민애 나래 참나리 꿩의다리 상연이
미운 놈 고운 놈 마구 섞여서
잡초와 화초가 마구 섞여서
사람과 화초가 마구마구 섞여서
너나없이 하나 같이 들꽃 같아서
토요일 2교시가 온통 꽃밭이다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 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 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