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오랑캐꽃 이용악, 만추의 방동사니 김홍락, 미치광이풀 김승기, 닭의장풀꽃에게 보내는 편지 손재원 (2019.04.19)

푸레택 2019. 4. 19. 22:37

 

 

 

 

 

 

●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 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 게

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만추의 방동사니 / 김홍락

 

반나절을 쪼그리고 앉아서

풀칠이나 할까 싶은 쥐꼬리 임금에도

시도 때도 없이 야근하는 둘째며

서른이 넘도록 취업을 못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큰 아이를 생각하며

지천으로 자라나는 풀을 뽑았건만

돌아서면 눈앞 가득 풀 또 풀이다

나는 또한 무슨 까닭 무슨 권리로

그것들을 잡초라 이름하며

무두질하듯 모질게도 짓뭉개 버리건만

가을이 깊어가는 나의 텃밭에

다 자라지 못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만추의 방동사니가 꽃을 매달고 있다

 

● 미치광이풀 / 김승기

 

사람들아

너희들이 미쳤지 내가 미쳤느냐

 

오로지 꽃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뿐,

그래서 피워 울리는

자주색 종소리

미친 세상을 향한

평화와 사랑의 종소리 들리지 않느냐

 

과학이 발달할수록 복잡해지는 문명이

너희들을 미치게 하지 않았느냐

보아라

권모술수와 쾌락과 전쟁이

수많은 땅을 사막으로 헤집어 놓지 않았느냐

네 한 몸 편하자고 흔들어 대는

현란한 몸짓이

황사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 않느냐

 

아름다운 종소리 들려주려고

한평생 뜨겁게 살아온 몸이니라

너희들이 지은 죄를 내게 덮씌운다고

마음이라도 한결 가벼워지더냐

엎질러진 물은 말라버려도

그 뒷자국은 남느니라

 

건드리지 말거라

인사불성이 되는 건 너희들뿐이니라

 

● 닭의장풀꽃에게 보내는 편지 / 손재원

 

반갑다

닭의장풀꽃

 

처음 꽃사랑에

빠졌던 순간

너를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했었지

 

얇고 얇은 청색 꽃잎에

노란 꽃술이 돋보였던 너의 모습

 

어디 그뿐이니

망사처럼 생긴 너의 꽃받침은

또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아니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느 핸가 너는 너의 진짜 신기한 부분을

내게 보여 주었쟎니

물론 내가 너를 놓치지 않고

계속 들여다 보며 사랑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야

 

꽃받침 앞에

꽃술의 아래 부분을 받치는

흰색의 투명한 받침을 발견하고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조물주의 섭리와 너의 삶의 의지를

한꺼번에 느꼈기 때문이지

 

나와 꾸준히 사귀어 왔다고 해서

내가 너를 다 안 것일까

나와 또 다른 삶의 비밀이 있을텐데

난 너를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고

새로운 꽃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되었단다

 

홍릉수목원에서

너를 만났을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어찌나 미안하던지

한참동안이나 너와 눈맞춤을 했지 뭐니

 

익숙하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것보다

더 큰 감동과 의미로 다가 온다는 것을

너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