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큰집 / 신경림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 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 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낙타(駱駝)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시절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