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시골 큰집 신경림,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낙타 이한직, 오랑캐꽃 이용악 (2019.05.17)

푸레택 2019. 5. 17. 19:34

 

 

 

 

 

● 시골 큰집 / 신경림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 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 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 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낙타(駱駝)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시절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