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엄마 걱정 기형도, 추억에서 박재삼, 내 마음의 고향 6–초설(初雪) 이시영, 파장 신경림 (2019.05.18)

푸레택 2019. 5. 18. 18:21

 

● 엄마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추억에서 (1) / 박재삼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계 밑에

옹송그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 추억에서 (2) / 박재삼

 

해방된 다음해

노산 언덕에 가서

눈아래 무역회사 자리

홀로 삼천포중학교 입학식을 보았다

기부금 삼(三)천원이 없어서

 

그 학교에 못 간 나는

여기에 쫓겨 오듯 와서

빛나는 모표와 모자와 새 교복을

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저 먼 바다

섬가에 부딪히는 물보라를

또는 하늘하늘 뜬 작은 배가

햇빛 속에서 길을 내며 가는 것을

눈여겨 뚫어지게 보았다

 

학교에 가는 대신

이 눈물범벅을 씻고

세상을 멋지게 훌륭하게

헤쳐 가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오늘토록 밀려서

내 주위에 너무 많은 것에 지쳐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어렴풋이 배웠다

 

● 추억에서 (3) /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晋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내 마음의 고향 6–초설(初雪) /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 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 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 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시절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