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산길에서 이성부, 겨울밤 신경림 (2019.05.18)

푸레택 2019. 5. 18. 21:39

 

●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 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 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을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겨울밤 / 신경림(申庚林)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뒤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이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간 부인은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꺼나

술에라도 취해볼꺼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꺼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꺼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뭍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어 볼꺼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