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 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구두 한 켤레의 시 /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 리기다소나무 / 이재무
산 속 비탈에 서서 일요일 오후 내 게으른 산보
물끄러미 지켜보던, 몸이 부실한 사십년 생
리기다소나무여 그대의 고적한 울음
산책로 따라 내려와
오늘 밤 내 불면의 창 두드리는 것을 듣는다
그대 직립의, 가파른 生을 내 왜 모르랴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의 세월이 그대 깡마른 육신을
다녀갔을 것인가 그대의 누런 슬픔이
조용히 山을 흔들던 날도 있었으리
그대의 하찮은 기쁨이 山을 울리던 날도 있었으리
누구는 그대를 거만하다고 하고
누구는 그대를 감정도 모르는
누구는 그대를 유행도 모르는
외고집의 요량없는 샌님이라 하지만
그것이 표현을 아끼는 그대 성정인 것을 어쩌랴
그대의 울음으로 창 덜컹거릴 때마다
나의 영혼은 큰바람 만난 마른 빨래인 냥 펄럭거린다
애써 지운 추문이며, 치욕의 일기
썰물 뒤의 갯펄로 펼쳐지고
나는, 갑자기, 내일이 두려워진다
햇살 다녀간 얼음같이 내 불구의 삶 지워진다
내가 마음의 집 잃고 분주한 날에는 더욱 크게
우는 리기다소나무여, 앉고 싶고 눕고 싶은 나의 生을
거듭 걷어차며 호통치는 나의 畏友여, 엄한 스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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