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말 없는 나무의 말 이재무, 산길에서 이성부, 대추나무 김광규, 어떤 귀로 박재삼 (2019.05.19)

푸레택 2019. 5. 19. 22:29

 

 

 

 

 

 

● 말 없는 나무의 말 / 이재무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 앞 수령 50년 오동나무

저 굵은 줄기와 가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성진 가락과 음표들 살고 있을까

과묵한 얼굴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들끓는 소음의 부유물 조용히 가라앉는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과묵한 그에게서 그러나 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나도 모르는 전생과 후생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구업 짓지 말라는 것과 떠나온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인과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른다는 것을

옹알옹알 저만 알아듣는 소리로 조근거리며

솥뚜껑처럼 굵은 이파리들 아래로 무겁게 떨어뜨린다

동갑내기인 그가 나는 까닭없이 어렵고 두려운가

어느 날인가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밤은

누군가 창문 흔드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보니

베란다 밖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우람한 덩치를 크게 흔들어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무슨 말 못할 설운 까닭으로

달빛 스산한 밤 토방에 앉아 식구들 몰래 속으로 삼켜 울던 아버지의 울음을

훔쳐본 것처럼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예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시치미 딱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데면데면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생활에 지고 돌아온 저녁 그가 또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참 이상하다 벌써 골백번도 더 들은 말인데

그가 하는 말은 처음인 듯 새록새록

김장 텃밭에 배추 쌓이듯 차곡차곡 귀에 들어와 앉는 것인지

불편한 속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그의 몸속에 살고 있는 가락과 음표들 절로 흘러 나와서

뭉쳐 딱딱해진 몸과 마음 구석구석 주물러주고 두들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아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처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버리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나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따라 그이들을 따라 오르는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

 

● 대추나무 / 김광규

 

바위가 그럴 수 있을까

쇠나 플라스틱이 그럴 수 있을까

수많은 손과 수많은 팔

모두 높다랗게 치켜든 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마음 벌거벗은 몸으로

겨우내 하늘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겨울이 지쳐서 피해 간 뒤

온 세상 새싹과 꽃망울들

다투어 울긋불긋 돋아날 때도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다가

초여름 되어서야 갑자기 생각난 듯

윤나는 연록색 이파리들 돋아 내고

벌보다 작은 꽃들 무수히 피워 내고

앙징스런 열매들 가을내 빨갛게 익혀서

돌아가신 조상들 제사상에 올리고

늙어 병든 몸 낫게 할 수 있을까

대추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 어떤 귀로 /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에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뿌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은 땟국물 같은 어린 것들이

방안에 제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