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봄날은 간다 손노원, 고향집 어머니 권영분, 사평역에서 곽재구, 백합 향기 권달웅 (2019.05.21)

푸레택 2019. 5. 21. 18:16

 

 

 

● 봄날은 간다 / 손노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는 시인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요 노랫말로 뽑혔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목이 멘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나의 애송시(愛誦詩)고 애창곡(愛唱曲)이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가만히 눈 감으면 곧 잡힐 것 같기에 마음 아픈 추억이 된다.

 

● 고향집 어머니 / 권영분

 

어머니는 언제나 하늘을 이고

긴 밭고랑 김을 메시며 기도를 한다

 

급행열차도 서지 않는 산골마을 토담집에서

도시로 나간 큰 자식,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전히 어머니 안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로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웃음소리에

기다림의 행복으로 살고 계신다

 

곡식이 익어 가는 계절의 소리

해질녘 돌아오는 작은 발소리

흙냄새 베어있는 어머니 모습

깊은 물 소리 없이 흐르듯

어머니 깊은 마음은 자연만큼 편안하다

 

●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백합 향기 / 권달웅

 

버스가 화원 앞 정류장을 지날 때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백합 한 다발을 안고 올라왔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본다. 새하얗게 언 차창으로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지나가고 버스에 탄 몇은 쿨룩거린다. 갑자기 버스 안은 백합 향기가 난다. 작업복을 걸친 젊은이가 일어나 노인을 부축한다. 콩나물 봉지를 든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책가방을 든 학생이 웃는다. 나는 그 학생을 보고 웃는다. 변두리로 가는 버스에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흔들리고 고단한 몇은 웃는다. 누구에게 주려는 백합일까. 밖은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부는데 버스 안은 온통 백합 향기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