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은수저 김광균, 가을 무덤-제망매가(祭亡妹歌) 기형도 (2019.05.23)

푸레택 2019. 5. 23. 10:26

 

 

 

 

 

 

 

 

 

●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 산다화 : 동백나무의 꽃

 

● 은수저 / 김광균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가을 무덤 - 제망매가(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영하(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병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