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 산다화 : 동백나무의 꽃
● 은수저 / 김광균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가을 무덤 - 제망매가(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영하(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병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