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 / 정목일(鄭木日)
가을 들판에 가보면 고개 숙여 기도하고 싶다. 땅에 꿇어앉아 벼에 입 맞추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누가 이 들판에 황금빛깔을 가득 채워 놓았는가. 벼이삭들을 튼실하게 알알이 여물게 하였는가. 농부들의 땀에 저린 큰 손길이 느껴지고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이 떠오른다. 들판에선 씨앗을 뿌리고 뙤약볕을 마다하지 않고 김을 맨 농부들의 초록빛 거룩한 손길이 느껴진다.
가장 부드럽고 유순해 보이는 벼들이 태풍과 가뭄을 견뎌내고 들판을 온통 황금빛깔로 채워놓았다. 익어가는 벼의 빛깔과 향기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번쩍거리는 금빛과는 사뭇 다르다. 마음을 맞아들여 미소 짓게 하는 빛깔이다. 온화, 유순의 얼굴이다. 하늘과 기후가 내는 성숙, 완성, 깨달음의 오묘한 미소이다. 숨 막히는 무더위를 견뎌내고, 대지를 휘감는 폭풍의 시련을 겪고 난 후 짓는 표정이다. 감미로움을 전해주는 꽃향기와는 다르다. 위로, 충만, 환희를 안겨주는 뿌듯한 향기다. 벼는 일생의 전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음으로 얻은 빛깔과 향기로 가을 들판을 채워놓는다. 겸손과 인내에서 온 감동의 빛깔이며, 어쩌면 눈물의 향기인지도 모른다.
겨울 들판은 비어 있다. 벼들이 사라진 들판은 긴 휴식과 침묵 속에 빠진다. 논밭은 얼어붙고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벌거숭이 나무들은 비명을 내지른다. 겨울 들판은 비어 있지만 숨 쉬지 않는 건 아니다. 힘을 비축하고 있다. 얼었던 대지를 열어 제치고 생명을 발아시키기 위해 휴식기를 갖고 있을 뿐이다.
봄이 오면 농부들은 서둘러 논을 갈고 모판을 마련한다. 대지의 속살을 파 뒤엎는다. 흙덩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농부는 볍씨를 물에 불려 말리고 못자리에 씨를 뿌려 모를 만든다. 농부는 하늘로부터 모를 심고 수확하는 거룩한 임무를 위임받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에 초록빛 기도를 바친다.
논에 물을 넣고 날을 받아 모심기를 한다. 한 줄씩 맞춰가며 들판을 초록으로 가득 채워놓는다. 모심기를 끝낸 논을 바라보는 순간, 농부는 자신도 모르게 한 포기 모가 됨을 느끼리라. 이 모들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 빛깔을 거두는 기쁨을 가지게 되리라.
들판에 나가면 하늘의 말과 벼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벼와 숨을 맞추지 않은 사람은 진실한 농부라 할 수 없다. 벼들은 농부들의 발걸음 소릴 듣고 자란다. 농부들은 벼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벼야말로 인류를 먹여 살리는 더 없이 고마운 곡물-. 전 세계 인구 절반이 주식량으로 삼는 농작물이 아닌가.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식량이 되고 목숨 줄을 잇게 해준다. 생명을 주고 기른 어머니이자,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이 풀을 주신 게 아닐까.
여름의 들판은 벼들이 커 가는 숨소리로 가득 찬다. 농부들은 논에 들어가 피를 뽑아낸다. 태풍에 넘어진 벼포기들을 일으켜 세우고 비가 온 뒤엔 물이 잘 빠지게 배수로를 만들어 준다.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벼들은 무더기로 쓰러진다. 벼들은 다시 일어난다. 어울려서 힘을 내어 일어선다. 목이 타들어가고 물에 잠겨도 묵묵히 견뎌낸다. 멸구에 시달리면서 밤을 지새운다. 7, 8월에 꽃술만 삐쭘 드러내는 연한 노란색의 벼꽃은 햇빛에 반짝이는 귀여운 귀걸이 같다고나 할까.
농부는 가을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들을 보면서 흙, 물, 태양의 온기를 느끼고 벼의 은혜를 생각한다. 인류의 젖이 되고 밥이 되는 벼! 떡이 되고 술이 되는 벼! 흥과 신바람이 되는 벼! 노래와 춤이 되는 벼! 풍요와 평화가 되는 벼!
가을 들판의 벼들 앞에선 누구나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하리라. 농부에게도 고개 숙이고 감사해야 한다. 벼들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다. 말없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풍요와 안식을 안겨준다. 때가 되면 벼들은 들판을 비우고 사라진다.
벼는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을 키우는 위대한 모성을 지녔다. 아무리 찬미한다고 한들 어찌 그 은혜에 미칠 수 있으랴. 평생 동안 밥을 먹고 지내오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벼의 삶과 일생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족하고 미숙함을 느낀다.
아, 들판을 물들이는 벼의 황금빛으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순 없을까.
● 숨어서 피는 꽃 / 김병권
우리 집 정원에는 지난 해 거의 고사상태에 빠졌다가 되살아난 수국 한 그루가 있다. 평소 화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막상 죽었던 수국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니 여간 대견스럽지가 않았다.
이 수국은 지난 여름 삿갓 모양으로 생긴 큰 향나무그늘에서도 별 탈 없으려니 했는데, 실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여름에 피는 꽃일수록 햇볕을 잘 받아야 하고 통풍도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볕과 바람을 쏘이지 못해 질식 상태에 있던 것을 아내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옮겨 심어 가까스로 기사회생(起死回生)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 여름에는 꽤 싱싱하게 자랐는데도 이웃집의 쟁반 같은 수국보다는 빈약하고 포기도 적어 보였다. 여느 해 같았으면 벌써 탐스러운 꽃송이가 만발했을 텐데,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한 송이만을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좀 빈약하면 어떠하랴. 내가 평소 좋아하던 연보라 빛 꽃술을 벙그리며 연신 함박웃음을 피워주고 있는 것을 보면 절로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꽃은 청순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당당하게 들어내지 않고, 좀 수줍은 듯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 못내 측은하게 느껴졌다. 온갖 무성한 잎들에 가려진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수국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좀처럼 사람의 눈에 띄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옆에 있는 옥잠화 채송화 모란 등이 저마다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반해 혼자 수줍어하고 있는 저 가녀린 모습의 수국. 그러나 다른 꽃들과는 일체 미색(美色)을 겨루지 않고 뭇잎들 속에서 홀로 피어있는 자태는 사뭇 고고하기까지 하다.
꽃나무도 감성이 있는 것일까. 지난해 여름 모진 홍역을 치른 후 저렇듯 자신의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겸허(謙虛)에는 아마도 그 무슨 까닭이 있는 것만 같다. 주변의 꽃들이 화려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저 외톨이 수국한테 더 기울어지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날 저마다 난 체 하는 과시욕증후군(誇示慾徵候群)을 떠올려 본다. 그 어디서나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경박한 생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국 앞에 와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도야(陶冶)하는 은자(隱者)의 교훈을 일깨우게 된다.
정금미옥(精金美玉)도 반드시 뜨거운 열화(熱火) 속에서 단련되듯이 고난과 시련의 역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 생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들풀이나 돌덩이보다도 약한 것을 안다면 어찌 함부로 고개를 쳐들고 교만을 피울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잠깐 동안 강한 햇볕만 받아도 금세 시들어 버리는 나약한 꽃들이 어찌 신산인고(辛酸忍苦)를 겪은 저 수국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문득 <늙은 학은 아무리 굶주려도 마음가짐이 너그러우니 어찌 닭이나 오리들처럼 먹이를 다투랴> 라고 한 옛 선비들의 경구를 새삼스럽게 되뇌어 본다. 저 채송화나 나팔꽃처럼 너무 예민하고 직설적인 삶보다는 좀더 은인자중하면서 겸양과 관조의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일까.
밝은 태양이나 촛불도 실은 스스로 숨어서 몸을 태우고 있는 것이지만 그 덕망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다 보니 저렇듯 만인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이리라 덕불고유린(德不孤有隣)이란 말도 이와 같아, 옛 선비들도 숨어서 도(道)를 닦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그 빛이 이웃으로 번져 나가는 데는 스스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은자(隱者)였던 강태공이나 제갈량 같은 위인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도 바로 이런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지나친 처세욕(處世慾)에 급급한 나머지 항시 초조와 불안에 쫓기는 사람들의 생활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사를 막론하고 민틈없는 일정과 각본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거나 여유로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일상의 여유를 빼앗긴 현대인들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활의 여유라는 것은, 반드시 바쁜 일에 쫓긴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동중정(動中靜)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의 여유를 지닌 사람은 저 시끄러운 인파(人波)의 한가운데서도, 또는 포화(砲火)가 우짖는 전쟁마당에서도 오히려 한가한 마음을 가꿀 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마음가짐은 곧 그 사람의 생활태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한가로운 마음의 경지를 이룩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결국은 자아상실증에 빠지고 만다. 진실로 큰 뜻을 품고 일을 하려면 사물의 바깥세계에 서서 사물의 내부를 통찰하는 안목을 지녀야 하리라.
뭇 이파리에 가려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저 한 송이 수국을 통하여 나는 새삼스레 삶의 슬기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 목련꽃 필 무렵 / 박규환
목련꽃이 필 무렵이면 어렸을 때 내가 자랐던 시골집의 뜰에 피던 목련을 생각하게 된다. 병풍처럼 둘러친 대밭을 등진 남향의 우리집 뜰에 황금빛 봄볕이 아늑하면 망형(亡兄)의 병창(病窓)앞, 잎이 피기도 전인 나목(裸木)의 가지 끝마다에 붓처럼, 가지(茄)처럼 모두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세운 꽃망울들이 공간이라는 호수에 뜬 연꽃인 듯 피어나기도 하고 봉긋하게 모은 두 손인 듯 내일을 기약하는 모습을 생각한다.
내가 특히 목련이 필 무렵이면 옛집을 생각하는 데는 슬프게 살다 간 망형의 영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 지금 살아 있다면 여든 일곱의 나이인데 그가 돌아 가신건 마흔 여덟의 젊은 나이였으니 그가 죽고 나서 오늘로 4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형은 우리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는데 막내인 내가 태어나기 일년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우리 8남매는 어머니 없이 올망졸망 자란 것이다. 따라서 우리 8남매는 한몸처럼 결속했고 사랑했다. 특히 동생들에 대한 형의 사랑은 형제 사랑의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보다는 형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끝에 “처자는 의복이요, 형제는 수족이라.”는 옛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말 뿐이 아닌 실제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행동했었다. 한 말로 말해 그가 나중에 얻은 자기 자신의 아들, 딸들에 대한 사랑이 동생들 사랑보다 더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음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 실증은 갖가지 사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지금 내 자식들이 하는 우애라는 것을 나는 비웃고 싶어진다. 아버지마저 오래 살지 못했으니 나는 형의 보살핌으로 자란 셈이며 나에서 떠난 육친을 생각할 적엔 아버지보다는 형이 앞선다. 그 형이 열넷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했고 다음에 잘못해서 눈을 다친 것이 화근이 되어 끝내는 화농하기에 이르렀더란 것이다. 항생제가 판을 치는 오늘날이라면 문제가 없었으련만 70년 전의 옛일이니 사정은 다르다. 대도시에만 있었다는 병원을 찾아 부산도 서울도 다녔다지만 오늘날과 같은 안과의나 시설이 있을 리도 없었으므로 끝내 완치하지 못한채 오랜 세월을 투병으로 허송했었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자식으로 읽혀야 될 한학(漢學)의 수업에 게으르지 않았고 특히 서도(書道)에는 어느 수준에 이르렀던 듯 싶다. 글씨를 잘 썼지만 요즘의 소위 서예한다는 뜻과는 달리 선비로써 당연히 갖추어야 될 것을 갖추었을 뿐, 자랑될 것도 없었고 요즘 낙관(落款)먼저 준비하는 서예인과는 달리 그는 낙관 하나 새겨본 적이 없었으며 남기기 위해 써둔 글씨 한 폭 없다. 그의 초서(草書)와 간찰(簡札)은 족히 남길만한 것이었음은 뒷 사람들이 아쉬워함으로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가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신학문에 대한 열기와 사조에 따라 상투 자르고 만학도로 서울의 중학생이 된 적도 있고 전문학교의 학생인 적도 있었으며 일본의 도시를 방랑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어렵지 않은 가세였음에도 집에서 돈을 가져다 쓴 적은 없었다. 어려울 땐 그의 글씨를 좋아해서 갖고 싶어했던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안질을 치료하기 위한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이 오히려 그를 실명의 불행으로 이끌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 몽매했던 의료지식이 빚은 과다한 수은의 남용으로 결국 그의 말년(장년)에 이르러 수은 남용의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실명의 불행을 겪어야 되었고 그로 인해 요즘으로야 청년일 수 밖에 없는 그런 나이에 밝음을 다시 되찾지 못한 채 영원한 어둠으로 떠나고 말았었다.
가련한 나의 형의 병창 앞에 지금 나의 회억 속에 한그루 자목련이 심겨져 있었다. 그 목련은 형이 아직 눈이 밝았을 적에 가져다 심어 놓은 것이었는데 내가 알기론 하동의 쌍계사 쯤에서 얻어다 심어 놓은 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쌍계사는 그가 좋아하던 사찰이었다. 그가 건강이 악화되기 전엔 자주 그곳에 드나들던 일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도 그곳 어느 친구 집에 낙관도 없는 그의 유묵(遺墨)이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다.
따사로운 봄볕이 남향한 마루 끝에 금빛 영토를 넓혀오면 그 앞에 서있는 자목련의 굵다란 목필(木筆)하고 가지 끝에 나비되어 앉아 미풍에 하늘대는 꽃나래가 그림자를 떨구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루끝에 나와 그걸 바라다보며 망연히 앉아있던 형, 그 형이 하루 아침에 끝내 실명하여 영원한 어둠을 안고 마지막 날까지 몇해를 보내야 했다.
형은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어둠과 설움과 아픔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던 해, 전쟁 중의 영양실조로 막대기처럼 말라든 형의 입에 미군이 풀어놓은 사탕을 구해다 넣어 드리면 황홀하게 당분을 탐하며 고마워하던 형은 끝내 그해 늦가을, 당시엔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영광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그가 품고간 한에 못지않게 우리들의 한이 또한 크다.
눈이 어두운 몇 번의 봄을 나면서 형은 나에게 뜰아래 목련꽃이 피었느냐고 묻곤했다. 그럼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미 피었다고도, 아직은 이르다고도 혹은 이미 낙화해 져버렸다고도 알려드리면 형은 자기가 묻고 있는 목련의 현황보다는 떨리는 나의 목소리만 듣고도 울긴 왜 우느냐고 달래곤 했었다.
그러던 형이 끝내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 시골집도 누구의 소유로 넘어갔는지 알 길 없으며 거기 서 있던 목련꽃 나무에 이르러서야 더구나 알 바가 없다. 그 뒤 나는 고향을 멀리하고 객지로 전전하며 생애의 대부분을 살아온 동안 4월이 오면 형의 슬픈 모습과 목련을 생각하는 버릇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어느 날 밤, 꿈속에 형이 나타났는데 그 깨끗하고 다정하고 재기에 넘친 건강했던 시절의 그의 모습이 아니라 꿈속에서도 생각하기 싫은 병상에서의 형의 모습이었다. 형은 “목련이 지금 피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꿈속에서도 그 옛집이 이미 우리 집이 아니고 그 목련 또한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네, 한창 피었네요.“하고 대답했더니 형은 금세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너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며, 그러나 네가 한 거짓말의 뜻이야 모르겠느냐고 생시처럼 너그러웠다. 형을 속인 죄책감을 어쩌지 못하다가 눈을 뜨고 나니 등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 나는 목련이 필 무렵이면 고향의 옛집을 생각하고 망형의 병창 앞에 서있던 한그루 자목련을 회상한다.
지금 지난해 이사 온 우리집 뜰에 옛 주인이 심었을 백목련꽃이 만개해 있다. 비록 나의 기억속의 자목련은 아니지마는 나의 옛집의 회상을 부르기에 충분하고 슬픈 나의 형의 명부(冥府)의 뜰 앞에도 피었을지 모를 목련과 그걸 바라다보고 있을 지도 모를 형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