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야, 혼자서 가라 / 최금진
속편하게 가라.
느타리버섯 같은 암 세포가
네 항문을 다 파먹고 이미 내장에까지 뿌리내렸다니
자식걱정, 와이프 걱정 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한민국 육군하사답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진격하듯이
그렇게 가라.
나이 서른여덟이면 피는 꽃도 지는 꽃도 아니지
스무 평 전세 아파트와
현금 이천만원 남겼으면 됐지
가늘게, 가늘게라도
네 외아들에게 원주 전씨 24대를 넘겨줬으면 됐지
아프다고 돌아누워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병실 문을 쾅 닫고 돌아서서 나온 것처럼
미련 두지 말고
그깟 생명보험 하나 못 들어둔 거
입을 거, 먹을 거, 다 못 누렸다고 원통해하지 말고
저 밤하늘에
곰팡이 포자처럼 둥둥 떠서
혼자 가라.
주섬주섬 짐을 싸서 이사 다니던 그날처럼
저승길 외롭다고 누굴 데려갈 생각 말고
돌아보지 말고
살아서 지겨운 가난,
너 혼자, 너 혼자서, 다 끝내고 가라.
● 그립다는 것은 /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수 없다는 뜻이다
볼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 같은 부대 동기들 / 김승일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텐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지은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게 많아지겠지?
앞으로 들어올 후임들한테, 무슨 죄를 지을지 계획하면서. 우리는 정신없이 웃고 까분다.
웃고 까부는 건 다 좋은데. 성사를 장난으로 생각하진 마.
우리가 방금 나눈 대화도 다음 성사 때 고백해야 돼.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동기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고.
역시 독실한 종교인은 남다르구나.
너는 오늘 무슨 죄를 고백했는데? 우리는 조금 빈정거렸다.
나는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하거든.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라서.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팔다리를 잡고 간지럼을 태웠는데도.
너는 절대 고백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겁이 났다. 저 독실한 신자 녀석이.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 가을의 기도(祈禱)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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