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기억 속의 장소 (daum.net)
중·고등학교 물리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두 개의 독립적인 변수로 다룬다. 속력은 장소의 차이에서 시간을 나누어서 계산된다. 하지만 마음에서도 시간과 장소가 별개로 다뤄질까? 모든 경험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던 장소, 출근길 버스를 타는 정류장처럼 내가 방문하기 전까지 정보에 불과했던 장소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경험한 뒤에야 의미있는 공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기억 속의 장소는 나의 경험 및 그 경험이 일어난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장소와 기억
뇌 속에서 장소와 기억과 관련된 부위는 해마이다. 해마는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다’처럼 말로 할 수 있는 지식, 혹은 ‘점심으로 생선구이를 먹었다’처럼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양쪽 해마가 손상되면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한다. 수술로 양쪽 해마의 대부분을 잃게 된 H M이라는 환자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던 사람이 한동안 방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이 사람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 인사하던 순간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마는 공간에 대한 기억과 탐색에도 관여한다. 어떤 상자에 쥐를 넣어두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해마 안에서는 쥐가 특정한 위치를 지날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 X는 쥐가 장소 A를 지날 때 활성화되고, 신경세포 Y는 쥐가 장소 B를 지날 때, 신경세포 Z는 쥐가 장소 C를 지날 때 활성화되는 식이다. 쥐가 장소 C, A, B 순으로 이동하면, 신경세포 Z, X, Y가 순차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인 위치와 신경세포의 활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신경세포들을 ‘장소 세포’라고 부른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장소 세포들의 활동과 무척 달라 보인다. 해마는 어떻게 이처럼 달라 보이는 두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걸까?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번째 가설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가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위치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가설은 기억에 얽힌 정보는 대뇌 피질 등 다른 곳에 저장되어 있고, 장소 세포는 이 정보들의 색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장소 X에 대한 대뇌 피질의 활동이 장소 세포 A와 연결되어 있고, 먹이에 대한 대뇌 피질의 활동이 장소 세포 B와 연결된 경우를 생각해보자. 장소 X에서 먹이를 먹었던 쥐의 해마에서 신경세포 A와 B의 연결이 강화되면, 장소 세포 A만 활성화시켜도 장소 세포 B를 덩달아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쥐는 장소 X에 가기만 해도 먹이를 기대하게 된다.
이 두 가설은 상충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첫번째 가설에서는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장소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쥐를 상자에 넣었는데 장소 세포 X가 첫날에는 상자 안의 장소 A에서 활성화되다가, 둘째 날에는 장소 B에서 활성화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두번째 가설에서는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장소가 아닌 대뇌 피질과 연결되므로 이런 변화가 있어도 괜찮다.
기억의 색인
작년 이맘때 출간된 한 연구에선 급속초기발현 유전자의 활동을 사용해 두 가설을 비교했다. 뇌가 아닌 기계라면, 기계의 작동 자체가 기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지는 않는다. 어제 내가 자동차를 운전한 방식이 오늘 자동차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뇌는 다르다. 변하는 환경과 몸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학습하려면, 이번의 활동이 어떻게든 다음 활동에 영향을 줘야 한다. 이렇게 영향을 주는 대표적인 방법이 유전자 발현이다.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는 세포 활동이 유난히 활발할 때 즉시 발현되는 유전자들을 말한다. 이 유전자들은 신경세포의 활동과 학습과 관련된 단백질들의 발현을 조절해 신경세포의 지금 활동이 다음 활동을 바꾸게 한다. 따라서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해마 장소 세포들은 이 유전자들이 발현될 때 일어난 사건의 기억과 관련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쥐를 상자 A에 넣어서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장소 세포와 그렇지 않은 장소 세포들을 찾고 이 세포들이 쥐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활성화되는지 관찰했다. 다음날 쥐를 같은 상자에 넣어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위치가 변했는지 살펴보았다. 실험 결과,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장소 세포들은 상자에 들어간 첫날과 둘째 날 각기 다른 위치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결과는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공간적인 위치가 아닌 기억의 색인을 저장한다는 두번째 가설을 지지한다.
또 연구자들은 쥐를 새로운 상자 B에 넣어서 장소 세포들의 활동을 관찰했다. 상자 A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했던 장소 세포들의 활동은 새로운 상자 B에서 활동이 억제되었다. 반면, 상자 A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하지 않았던 장소 세포들의 활동은 새로운 상자 B에서 달라졌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쥐가 상자 B 안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탐색을 시작하기 전에, 쥐가 새로운 상자에 들어서자마자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공간적인 위치가 아닌 기억의 맥락(이 경우 상자)과 얽혀 있는 셈이므로 이 결과도 두번째 가설에 가깝다.
경험으로 연결된 장소와 시간
과학은 과학자 집단이 증거를 겨루는 활동이므로, 앞서 설명한 하나의 연구만으로 어떤 가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더 많은 후속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기억과 공간이 해마라는 하나의 부위에서 처리된다는 사실을 둘러싼 두 가설은 특정 순간의 기억이 공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뇌 속에서 장소는 경험을 통해 시간과 얽혀드는 셈이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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