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공감의 유리함 (daum.net)
나의 아빠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닭을 많이 기르는 지인으로부터 한 나절쯤 병아리들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병아리가 작은 방 하나에 가득할 만큼 많았던지라, 삐약삐약 재잘거리는 소리도 제법 컸다. 그런데 닭이건 강아지건 어린 시절에는 대개 호기심이 많지 않나. 아빠가 가만히 누워 있노라니, 병아리들이 콕콕 쪼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를 콕콕 쪼아대니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성가셔서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어보았다. 그 순간, 삐약삐약 소리로 가득하던 방이 일시에 조용해졌다고 한다. 겁을 먹은 병아리들이 바짝 굳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몇 초만 지나도 다시 삐약거리며 콕콕 찍어댔지만. 그날 아빠는 휘파람을 여러 번 불어야 했다.
방 안은 삐약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는데 모든 병아리들이 아빠의 휘파람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 혹시 휘파람 소리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의 병아리들이 겁을 먹으니 덩달아 겁을 먹은 병아리도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의 답을 알려면, 병아리들 사이에서도 감정이 전염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감정의 전염
감정은 전염된다. 그래서 주변에 침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침울해진다. 주변에 밝고 명랑한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처럼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감정이 맞춰지는 현상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한다.
감정의 전염은 공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공감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공감은 감정의 전염보다는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의 처지를 사실적으로 요약했을 뿐 그 사람의 감정에 대한 정보는 전혀 담지 않은 자료만 읽고도 그 사람의 입장과 감정을 추론하고, 추론한 감정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몸짓, 표정, 목소리, 말투 등 상대방의 감정을 알려주는 정보를 어느 정도 접할 수 있다. 공감에서 인간의 언어 능력 덕분에 가능해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당 부분 감정의 전염과 관련된 셈이다.
여러 사회 현상에서 공감 부족이 문제시되다 보니, 공감은 대단히 어렵고 특별한(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쥐, 돼지, 큰까마귀도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감정이 전염된다고 한다. 예컨대 쥐 A와 B를 한 쥐장에서 며칠간 함께 기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A쥐를 특정한 상자에 넣어두고 발에 전기쇼크를 주면, A쥐는 나중에 이 상자에 들어가기만 해도 벌벌 떨면서 무서워하게 된다. 이를 공포 학습이라고 한다. 공포 학습을 갓 끝낸 쥐를 원래의 쥐장에 넣어서 10분간 동료 쥐 B와 함께 지내게 둔 뒤, 이번에는 쥐 B에게 공포 학습을 시킨다. 그러면 쥐 B는 전기 쇼크를 주는 상자에 있는 동안 쥐 A보다 더 많이 떤다고 한다. 쥐 B는 쥐 A와 함께 있는 동안 쥐 A의 공포 감정에 전염된 상태에서 공포 학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감이 주는 이점
감정은 왜 전염되는 것일까? 감정이 환경적, 신체적 필요에 부응하여 뇌의 작동 양식과 생리 상태, 행동 양식을 조율하는 적응적인 작용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화가 아주 많이 났는데, ‘아, 화난다’고 냉담하게 생각만 하는 사람은 없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사고도 평소와는 달라지며,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가 된 상태가 화가 난 상태다. 그래서 서로 다른 개체 간에 감정이 전염되면, 상황에 대한 정보도 빠르게 공유할 수 있다. 예컨대 무리 중의 한 개체가 두려워한다면, 다른 개체도 덩달아 두려워함으로써 잠재적인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
큰까마귀를 이용한 최근 연구를 통해서, 감정의 전염이 다른 개체에게 감정적인 변화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 양상도 바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팀은 큰까마귀들을 관측자 그룹과 실행자 그룹으로 나누고, 관측자 그룹의 큰까마귀들에게는 새장의 한쪽 끝에서는 먹이를 얻을 수 있고, 반대쪽 끝에서는 먹이를 얻을 수 없음을 학습시켰다. 충분한 학습이 이뤄진 뒤, 새장 안의 임의의 장소에 새로운 먹이통을 두면 사전정보가 없는 큰까마귀는 이 먹이통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실행자 큰까마귀로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전염되면 새 먹이통에도 시큰둥해하고, 실행자 큰까마귀로부터 긍정적인 감정이 전염되면 새 먹이통에 흥미를 느껴 먹이가 없는지 얼른 확인해 볼 것이다.
연구자들은 관측자 그룹의 큰까마귀를 충분히 훈련시킨 뒤, 이들을 실행자 그룹의 큰까마귀가 보이는 새장으로 옮겼다. 실행자 그룹의 큰까마귀에게는 맛있는 먹이와 맛없는 먹이를 둘 다 준 뒤, 맛있는 먹이 또는 맛없는 먹이를 빼버렸다. 그러면 실행자 그룹의 큰까마귀는 맛없는 먹이가 남았을 때는 실망해서 다른 곳을 더 자주 기웃거린다. 반면, 맛있는 먹이가 남았을 때는 먹이가 있는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열심히 머리를 움직여 먹이를 먹었다. 관측자 그룹의 큰까마귀는 실행자 그룹의 큰까마귀에게 어떤 먹이가 주어졌는지는 볼 수 없고 실행자 그룹 큰까마귀의 행동만 볼 수 있었다. 연구자들의 가설이 옳았다. 관측자 그룹의 큰까마귀들은 실행자 그룹 큰까마귀가 (맛있는 먹이를 먹고) 좋아하는 모습을 본 뒤에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먹이통을 확인했다. 반면 실행자 그룹 큰까마귀가 실망한 모습을 본 뒤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사람, 돼지, 쥐 같은 포유류뿐만 아니라 까마귀와 같은 조류도 서로 공감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공감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의 행동을 수정하도록 안내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같은 종 안에서 너에게 나쁜 일은 나에게도 나쁜 경우가 많고, 우리 집단에 나쁜 일은 나에게도 나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에게 이롭기 때문에라도 타인을 공감해야 할 모양이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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