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제약 조건은 또 다른 생존의 버팀목 (daum.net)
신경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가소성이다. 가소성이란 신경계의 모양과 활동 특성이 경험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성질을 말한다. 신경세포는 모양도 변하고,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과 연결 세기도 변한다. 신경세포가 분비하는 물질의 종류도 변하고, 신경세포에서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도 변하며, 신경세포의 활동성도 달라진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신경세포가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유전자 발현 양상도 변한다. 신경계에서는 도대체 변하지 않는 게 있기는 할까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변한다.
더욱이 이런 변화가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신경세포들이 인접하여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인 시냅스의 모양은 초 단위로도 변할 수 있다. 시냅스의 모양이 변하면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세기가 변하므로, 신경계의 반응 양상도 달라진다. 시냅스의 세기 변화는 학습과 기억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다. 신경계는 성인이 된 후에는 변하지 않는 태엽 기계라기보다는 구석구석 변해가는 시스템이다.
◇ 변수의 개수와 최적화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신경계가 적응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신경계를 최적화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떤 방에 히터만 있다면, 이 방에서는 실내 온도만 조절할 수 있고, 조절 방법도 단순할 것이다. 반면 방에 창문과 커튼, 에어컨, 선풍기, 양초, 히터, 공기청정기,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가 여러 개 있다면, 산소 농도와 온도, 습도, 바람의 세기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장치의 효과가 상호작용하므로 조절 방법도 복잡다양할 것이다. 예컨대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 양초, 에어컨, 창문이 모두 습도를 바꾸고, 양초와 에어컨, 창문은 실내 온도에도 영향을 주므로 목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려면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처럼 조절하는 방법이 다양하면 최적화가 어렵다. 어찌어찌 목표 습도를 맞췄다고 하더라도 가습기와 제습기를 동시에 틀어두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낮에는 선풍기를 틀어야 목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저녁에는 추워질 수도 있다. 신경계에서 최적화의 실패는 각종 질병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이 사건과 조금만 관련된 자극을 접해도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병을 말한다. 이 병도 신경 가소성과 관련이 깊다. 모든 기억은 신경계의 변화를 동반하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지나치게 강하게 기억되고, 비슷하지만 다른 기억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신경계가 변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고, 잊어버려도 큰 문제가 없는 일들은 잊어버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병에 걸리지도 않으면서 살아간다. 뇌 속에 수백 가지의 신경세포가 있고, 이 신경세포들이 각각 모양, 유전자 발현, 연결 세기 등을 바꿀 수 있음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 제약 조건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모든 방향으로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감각회로는 제한된 에너지와 노이즈라는 제약하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도록 동작한다는 이론이 제기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또 신경계는 항상성을 지켜야 한다. 개에게 A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고, B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개는 A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꼬리를 흔들고, B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시큰둥해하면서 두 종소리에 다르게 반응한다. 신경세포도 비슷한 일을 한다. 어느 신경세포 X가 두 개의 신경세포 A와 B로부터 정보를 받는데, 신경세포 A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더 중요하다면 신경세포 A와의 연결이 B와의 연결보다 강해야 한다. 이제 신경세포 A와 X 사이의 연결 세기와 신경세포 B와 X 사이의 연결 세기가 둘 다 3으로 같았지만, 낮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신경세포 A와의 연결 세기가 5로 증가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러면 신경세포 A로부터의 입력이 더 중요해지기는 하지만 연결 세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총 비용이 증가한다. 그래서 A-X 사이의 연결 세기를 4로, B-X 사이의 연결 세기를 2로 줄여서 총 유지 비용은 크게 늘리지 않되, 연결 세기들 간의 차이는 유지하는 과정이 밤에 자는 동안에 일어난다. 이것이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들은 더 잘 기억되고, 어떤 일들은 더 잊혀지는 이유라고 한다.
또한 변하는 환경에 날쌔게 적응하면서 생존에 유용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경세포의 활동량은 강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낮추고, 약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높여 주변 환경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한다. 밝은 곳에 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담쟁이 덩굴이 자라는 돌담처럼
돌담은 담쟁이 덩굴이 벽 안쪽으로 자랄 수 없게 제약한다. 하지만 돌담 덕분에 담쟁이 덩굴이 위로 뻗어갈 수 있다. 지구 환경이 주는 제약 조건도, 생명체라는 제약도 다채로운 가소성을 가진 신경계에는 돌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공지능 컴퓨터에는 아직 생명체가 경험하는 제약에 비견될 만한 제약이 없다. 전기료와 데이터(감각정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를 사람이 제공하니까. 어쩌면 인공지능의 새로운 지평은 로봇 신체라는 제약이 생긴 이후부터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딥러닝 덕분에 ‘인간만의’ 정신 능력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듯, 그 무렵이면 신체에 대한 우리 생각도 바뀌게 될까.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19.08.28
/ 2022.05.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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