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움직임과 시간 (daum.net)
신경계는 움직임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움직이는’ 동물들에게 있다. 극단적인 예로 멍게류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어린 시절에는 신경계를 갖고 있지만, 적당한 곳에 정착해서 움직이지 않게 된 뒤부터는 신경계를 몸속의 지방처럼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서 없애버린다.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몸의 위치와 자세가 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움직이려면 신경계가 시간을 인식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날아오는 공이 언제쯤 내 손이 닿는 곳에 도달할지 예상하고, 거기에 맞게 뛰어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에 맞추어 발을 움직이는 것도 박자의 간격을 인식하고 다음 박자를 예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대폰 시계 하나로 수백 밀리초에서 수 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도 재고, 몇 시간에서 며칠에 이르는 긴 시간도 재지만 생체는 그렇지 않다. 하루처럼 긴 시간은 빛이 밝고 어두워지는 주기에 맞춰서 특정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함으로써 인식한다. 시상하부에는 시교차상핵이라는 부위가 있는데, 이 부위의 신경세포들은 밝을 때는 활동이 활발하다가, 어두워지면 활동량이 뚝 떨어진다.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에 따라 유전자 발현과 에너지 대사, 신경조절물질의 분비 등이 조절된다. 그보다 짧은 시간에 대해서는 시간 범위에 따라 다른 신경 원리가 적용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 짧은 시간의 인식
음악 감상과 작곡, 움직임의 조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등에서 중요한 시간 범위는 수십 밀리초에서 수십 초다. 안타깝게도 아직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려진 것들이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시각 정보를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후두부 영역인 일차 시각 영역에는 특정한 각도로 기울어진 선을 볼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들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일차 청각 영역에는 특정한 간격으로 나는 소리를 들을 때 활성화되는 청각세포들이 있다. 이 신경세포들의 민감도는 훈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연구에서는 쥐에게 3킬로헤르츠(㎑)의 소리를 짧게 들려준 후에 7㎑의 소리를 잠깐 들려주었다. 이때 두 소리의 간격을 다양하게 하되, 두 소리의 간격이 100밀리초일 때만 보상을 줘 몇 주간 훈련시켰다. 그 뒤 7㎑에 반응하는 신경세포들의 민감도를 관찰했다. 이 신경세포들은 3㎑의 소리가 들린 지 100밀리초 후에 7㎑의 소리가 들렸을 때만 활동량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실험이 이루어진 바 있다. 이 실험에서는 ‘삑!’ 하는 짧은 소리의 간격을 조금씩 바꾸면서 간격이 100밀리초보다 긴지 짧은지를 구별하게 하는 훈련을 매일 1시간씩 10일 동안 실시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100밀리초와 124밀리초를 간신히 구별하던 사람들이 훈련이 끝날 무렵에는 100밀리초와 112밀리초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와 같은 개선 효과는 훈련받지 않은 시간 간격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밀리초보다 조금 더 긴 간격과 200밀리초를 구별하는 능력은 100밀리초에 대해서 훈련을 한 뒤에도 향상되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는 생체 내에 하나의 표준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시간이 움직임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만큼, 움직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부위들이 시간 인식에도 관여하고 있다. 등쪽 줄무늬체는 선택한 움직임을 실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다. 어느 연구에서는 쥐에게 짧은 소리를 두 번 들려주고, 소리의 간격이 1.5초보다 짧을 때는 오른쪽 구멍에 코를 넣고, 1.5초보다 길 때는 왼쪽 구멍에 코를 넣으면 먹이를 주는 훈련을 시켰다. 이후 훈련된 쥐의 등쪽 줄무늬체의 신경세포들을 억제했더니, 간격 구별을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다. 또 등쪽 줄무늬체의 신경세포들은 첫 번째 소리가 들린 후 두 번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특별한 반응 양상을 보였는데, 이 반응 양상만으로도 쥐가 1.5초보다 길다고 판단할지, 짧다고 판단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집단적인 반응 양상이 더 많이 진행될수록 쥐는 두 소리의 시간 간격이 (실제로는 짧더라도) 길다고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등쪽 줄무늬체 신경세포들의 반응 양상이 내적 시계처럼 작동했던 셈이다. 아마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신경조절물질(도파민 등)이 분비되면, 쥐가 인식하는 시간도 달라지지 않을까.
움직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뇌도 시간 인식에 관여한다. ‘삐~’ 하는 소리를 들려준 지 2초 뒤에 토끼 눈에 바람을 불어넣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이 실험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토끼는 소리가 들린 지 2초 후에 눈을 감는다. 하지만 토끼의 소뇌를 손상시키거나 억제하면 눈을 감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2초 후가 아닌 다른 타이밍에 눈을 감는다고 한다. 이 실험은 수백 밀리초에서 수 초 간격에 맞게 움직이는 데 소뇌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시간과 공간에 펼쳐지는 생명
앞에서 설명한 신경 원리들은 세포를 구성하는 생체 분자들의 느리거나 빠른 반응들을 거쳐 이루어진다. 세포 안에는 세포막 안팎의 전압에 반응해서 나트륨 통로가 열리는 것처럼 빠른 반응도 있고, 특정한 종류의 칼슘 통로가 열렸다가 닫히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는 반응도 있다. 신호 분자가 세포막으로 확산해 가서, 세포막에 있는 다른 분자와 결합한 후에야 시작한 뒤, 한동안 지속하는 반응도 있다. 다양한 위치에 흩어진 느리고 빠른 반응들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생명 현상이 일어나고, 신경계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예측이란 현재를 미래와 연결하는 과정이고, 예측하는 신경계가 이끌어낸 신체의 움직임은 세상의 어딘가를 바꾸는 과정이다. 이렇게 보면 움직임과 생명현상은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예술인 듯싶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19.11.20
/ 2022.05.23 옮겨 적음
'[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0) | 2022.05.23 |
---|---|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뇌과학 연구에서 정책까지 (0) | 2022.05.23 |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기억에 접속하는 방법 (0) | 2022.05.23 |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신경마케팅 (0) | 2022.05.23 |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노래를 듣는 뇌 (0) | 2022.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