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기억에 접속하는 방법 (daum.net)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커피를 좋아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마신 커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어쩌면 생애 처음 마신 커피였을 달달한 믹스 커피, 시험공부를 하다가 도서관에서 마신 자판기 커피, 추운 겨울에 손을 녹일 요량으로 마시던 캔 커피, 인상적이었던 카페, 함께 마신 사람들… 내 머릿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십에서 수천의 장소를 지나고, 수백가지 음식을 먹고, 온갖 사람을 만나 갖가지 사건을 경험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항상 떠올리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이 중 많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 뇌 속에 남아있다.
이 기억들은 의도적으로 떠올리거나, 기억과 관련된 무언가를 마주함으로써 떠올려질 수 있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단어들이 적힌 목록을 외우게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목록에서 꽃에 해당하는 것을 떠올려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장미, 튤립처럼 꽃들만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단서를 주면, 사람들은 무작정 목록 속의 단어들을 떠올려 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보다 더 많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떠올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잊혀진 것은 아님을 뜻한다. 완전히 잊혀진 일도 있겠지만, 지금 떠올려지지 않을 뿐인 기억도 있다.
◇ 기억흔적
뇌 속에서는 기능이 곧 구조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뇌 속의 어떤 부분이 구조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외부 사건에 반응해서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이나 신경세포의 활동 특성이 변하는데, 이렇게 변한 부분을 기억흔적(engram)이라고 한다. 기억은 기억흔적에 저장된다.
기억의 회상을 연구하려면 특정한 기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표시하고,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무 신경세포나 기억흔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 중의 일부가 기억흔적이 된다는 사실이 활용된다.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에서는 종종 급속초기발현 유전자가 발현되므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이 유전자가 발현된 신경세포들은 그 사건의 기억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에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를 찾아서,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실험자가 조절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이를 위해서 광유전학과 약물을 혼합한 방식이 더러 사용된다. (1)약물 X가 체내에 없을 때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의 발현이 유전자A의 발현을 유도하고, (2)유전자A의 발현은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의 발현(광유전학)을 유도하도록 생쥐의 유전자를 변형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생쥐에게 평소에는 약물 X를 투여하다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약물 X의 투여를 중단한다. 그러면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서는 유전자A가 발현되고, 연달아서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이 발현된다. 이렇게 하면 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이 방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한 연구에서는 생쥐를 상자에 넣고 발에 전기충격을 주어 공포학습을 시키는 동안, 위 방법을 사용해서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빛으로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는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들어가기만 해도 벌벌 떨었다. 그 상자가 전기충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억제하면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있어도 훨씬 더 적게 떨었다. 한편,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라도 전기충격을 받지 않은, 다른 상자에 들어가면 별로 떨지 않는다. 전기충격을 떠올릴 단서가 없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자극하면, 생쥐들은 마치 전기충격 상자에 있는 것처럼 벌벌 떤다고 한다.
위와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실제 없었던 사건의 기억흔적을 만들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는 다른 실험에서는 생쥐에게 향기A가 풍기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었다. 그 뒤 향기A가 나는 방과 다른 향기B가 나는 방을 생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면, 생쥐는 향기B가 나는 방에서 더 오래 머문다. 전기충격을 받았던 기억과 관련된 향기는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쥐가 향기A를 맡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는 대신, 향기A에 반응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키는 동안 회피 반응을 강화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향기A를 맡은 적도, 전기충격을 받은 적도 없었음에도 생쥐들은 향기A가 나는 방보다 향기B가 나는 방을 선호했다. 이는 생쥐에게 향기A를 기피하는 기억이 인공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기억 연구에는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 기억: 떠올려지고 변해가고 잊혀지는
기억은 영구불변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기억의 내용이 변하기도 하고, 영원히 잊혀지기도 한다. 요즘 자주 접하는 것들과 거리가 멀어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오늘 또 하루치의 행복한 기억을 쌓아가시길.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20.01.15
/ 2022.05.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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