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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익숙한 콜 센터 풍경

푸레택 2022. 5. 10. 07:52

[노명우의 인물조각보]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익숙한 콜 센터 풍경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익숙한 콜 센터 풍경

[경향신문]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다. 필요한 경우 발명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쓸모를 사용자가 만들어 내기도 한다. 거창하게 명명하자면 발명의 민중화 혹은 이반 일리치의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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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익숙한 콜 센터 풍경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다. 필요한 경우 발명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쓸모를 사용자가 만들어 내기도 한다. 거창하게 명명하자면 발명의 민중화 혹은 이반 일리치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고유한(vernacular)’ 사용법 발명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상공을 날고 있던 한 비행기 조종사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빈병을 내던졌다. 소비자본주의의 관습에 따르면 빈병은 쓰레기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코카콜라 병을 부시맨이 발견하고, 그들은 빈병의 ‘고유한’ 사용법을 발명한다. 코카콜라 병은 악기가 되고, 절구통 방망이가 되고, 밀대가 되고, 망치도 된다. 영화 <부시맨>은 콜라병의 ‘고유한’ 사용법 연대기라고 해도 된다.

‘고유한’ 사용법은 한국에서도 발견된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부잣집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노르웨이 빙하수 생수병을 나는 꽃병으로 쓰고 있다. 소주병은 참기름 병으로 쓰기 딱 알맞다. 스티로폼 박스에 상추를 심는 ‘고유한’ 방법을 한국의 아파트 거주자는 잘 알고 있다. 철지난 잡지는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기에 제격이다. ‘고유한’ 방법은 우리 삶의 양식을 좌우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최소화된 저항일 수도 있다. 일회용품을 여러 번 쓰면 그만큼 소비시장의 규모는 축소되고 자본이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줄어든다. 비록 미약해도 ‘고유한’ 방법이 반복되면 시장 자본주의에 스크래치 정도는 낼 수 있다.

발명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용법을 개발해내는 데 있어 자본주의적 시장은 ‘고유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우리보다 민첩하다. 발명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웹은 사용되고 있다. 웹의 발명자는 학문 공유라는 거룩한 이상을 설계했겠지만, 시장은 포르노 유통의 새로운 통로를 웹에서 발견했다. 전화라는 미디어 역시 이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니엘 벨이 전화기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최초 발명자는 안토니오 메우치이다. 메우치는 아파서 집에 누워 있는 아내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대화하려고 전화기를 발명했다고 한다. 전화의 본래 용도는 서로 아는 사람끼리 대화하려는 것이었다.


전화의 용도는 사용자에 따라 그리고 시장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요즈음 서로 아는 사람조차도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개인과 개인은 음성이 아니라 SNS로 혹은 애플리케이션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사이 소비자본주의는 전화의 새로운 용처를 찾아냈다. ‘콜 센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하루에 수통의 전화를 텔레마케터로부터 받는다. 피자를 주문하려고, 분실한 신용카드를 신고하기 위해,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해서 등등의 사유로 콜 센터에 전화를 걸고 누군지 모르는 상담원과 통화한다.

전국에는 현재 3만여개의 콜 센터가 있고, 콜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5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에도 수차례 통화하는 상담원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대체 도시의 어디에 그들의 근무처가 있는지도 우린 알지 못한다. 일상적으로는 접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콜 센터를 한 소설의 안내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피자 프랜차이즈 콜 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했던 작가 김의경은 그곳에서 일하면서 관찰하고 직접 경험한 일을 생생하게 소설 <콜 센터>에 담았다. “똑같은 기계적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싫증나고 단조로운 고역, 이것은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다. 노동이라는 무거운 짐이, 바위처럼, 지쳐빠진 노동자 위에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온다.” 엥겔스가 19세기의 공장 노동자를 묘사한 이 구절은 김의경이 소설에서 묘사한 콜 센터의 풍경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책상이 빼곡하게 놓여 있는 콜 센터에서 상담사는 전화를 받고 또 받으며 거의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전화를 상담사를 괴롭히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상 블랙 컨슈머라 부르지만, 왠지 그 호칭보다는 ‘진상’이 그들에게 어울린다. 진상이 콜 센터 노동자에게 욕설을 하고 성희롱을 늘어놓으면,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상담사는 “귓속으로 파고드는 온갖 배설물을 홀로 외롭게 처리”해야 한다.

진상이 상담사를 괴롭히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진상은 평범하다. “80%가 대학생과 휴학생 그리고 얼마 안되는 취업준비생”으로 이루어진 비정규직 상담노동자를 전화로 괴롭히는 진상 역시 대개의 경우 약자다. 누군가 그 사람을 화나게 했고, 화나게 한 사람에게 갚아줄 수 없는 처지가 아닌 그 약자는 자신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 진상으로 변신한다. 약자들의 화풀이 폭탄 돌리기 연쇄사슬 중 맨 끝에 있는 콜 센터 노동자의 소원은 단 한 가지라고 김의경은 전한다. “블랙 컨슈머에게 똑같이 욕을 해주는 것, 모든 상담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담노동자는 간절한 소원을 절대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들을 대신하여 말해주고 싶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손님은 그냥 손님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왕이 없다는 뜻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때 왕의 목을 내리쳤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19.07.30

/ 2022.05.1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