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인물조각보]셀피 찍는 사람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셀피 찍는 사람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한마디로 완벽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흠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람에게 키스하려던 순간 깨달았다. 완벽한 그 사람이 연못 표면에 반사된 자신이었음을. 그의 이름은 나르키소스다. 한 시인이 우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시인은 돌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심정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그는 시인 윤동주다. 어떤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22살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63살이 될 때까지 그렸다. 그는 자화상으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남긴 자화상은 무려 100점이 넘는다. 그 사람은 렘브란트다.
퓨 리서치가 2019년 세계 27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95%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기능 중 사랑받기로는 셀피(selfie), 즉 셀카 찍기가 으뜸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셀피를 찍는 데 1주일에 평균 1시간을 소비한다고 한다. 이 추세라면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한 명당 2만5700개의 셀피를 찍을 거라 한다.
셀피를 찍기 위해선 렘브란트의 예술적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왕비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거울에게 묻고 또 묻는다. 셀피를 찍는 사람은 거울에게 묻지 않고 얼짱 각도를 연구해 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찍고 또 찍다보면 언젠가는 납득 가능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삐죽 입을 내밀어도 보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어도 보고, 찍는 각도를 바꾸어도 보고 자아를 연출할 수 있는 온갖 테크닉의 도움으로 납득할 만한 셀피를 결국은 얻고 만다. 만약 자아연출의 각종 테크닉으로도 원하는 셀피를 얻지 못하면 셀피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다 잡티와 주름살을 발견해서 우울한 사람에게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은 인스턴트 항우울제이다.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성형수술 없이도 성형수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렘브란트가 그리고 또 그린 자화상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셀피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찍고 또 찍어 만들어진 디지털 자화상 셀피에서 시간은 실종된다. 아니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얼굴엔 잡티가 없다. 주름살도 없다. 셀피가 된 각자의 얼굴은 초현실이다. 스마트폰의 카메라 렌즈는 주름살 다리미나 마찬가지다. 어느새 쫙 펴진 내 얼굴, 통통해진 내 얼굴, 마음에 드는 혈색을 지닌 내 얼굴, 눈을 더 키운 내 얼굴, 코를 좀 높게 한 내 얼굴 무엇이든 가능하다. 《백설공주》의 왕비는 거울에게 말을 건네지만, 애플리케이션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넌 어떤 얼굴을 원해? 신선한 얼굴? 매혹적인 얼굴? 애기 피부 같은 얼굴? 갸름한 얼굴? 고상한 얼굴? 말만 해. 내가 다 만들어줄게. 원하면 컬러 렌즈를 낀 얼굴도 만들어줄 수 있어. 팔자주름을 싫어하는구나? 내가 없애줄게. 애교살을 갖고 싶다고? 문제없어. 내가 만들어줄게.”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관찰했다. 윤동주는 내면에 묻어 있는 티끌을 찾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봤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에 세월을 기록했다. 셀피를 찍는 사람은 나르키소스도 윤동주도 렘브란트도 아니다. 셀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스마트폰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은 봉인된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다. 셀피는 전시되기 위해 만들어진 자아이자, SNS의 ‘좋아요’를 수집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진이란 자고로 기념사진이며, 추억의 도구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셀피에서 윤동주와 렘브란트의 고뇌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투덜댈 수 있다. 셀피에 빠진 사람을 디지털 나르키소스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사실 셀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털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셀피는 사진처럼 보여도 사진이 아니다. 셀피는 예외적인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수단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하고 자란 사람에게 셀피는 일상의 픽 스피치(Pic Speech)다.
그들은 셀피를 때로는 감탄사로, 때로는 의미 없는 허사(虛詞)로 사용한다. 셀피는 심심하다는 자기고백이기도 하고, 나와 함께 놀아달라는 칭얼거림이기도 하고, 새로 산 이 옷이 어떠냐는 질문이기도 하고, 오늘 좋은 곳에 왔다는 자랑의 기호이기도 하다. SNS에 전시된 셀피는 나의 안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인사말이자 내가 세계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SOS 신호이기도 하다. 셀피는 어떤 때는 독백이고 어떤 때는 방백이고 대화이다. 셀피는 사람의 얼굴로 메시지를 전하는 21세기의 디지털 상형문자이다. 셀피를 언어로 이해하는 사람은 열심히 셀피를 찍고, 셀피를 사진이라 이해하는 사람은 셀피 찍는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셀피의 시대,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셀피를 언어로 이해하는 사람과 셀피를 쓸모없는 사진으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19.06.04
/ 2022.05.07 옮겨 적음
'[생각의 숲] 삶의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약자의 약자 괴롭히기, 익숙한 콜 센터 풍경 (0) | 2022.05.10 |
---|---|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음식 (0) | 2022.05.10 |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수집하는 사람 (0) | 2022.05.07 |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일은 더 많이 하고, 잠은 덜 자는 나라 (0) | 2022.05.07 |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별칭이 ‘오지라퍼’ 혹은 ‘꼰대’인 사람 (0) | 2022.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