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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VIP’로 불리는 ‘진상’을 만나다

푸레택 2022. 5. 10. 07:55

[노명우의 인물조각보]'VIP'로 불리는 '진상'을 만나다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VIP'로 불리는 '진상'을 만나다

[경향신문]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가 식인 풍습을 지닌 거인 괴물에게 포로로 잡혔다. 꼼짝없이 잡아먹힐 판이다.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괴물이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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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VIP’로 불리는 ‘진상’을 만나다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가 식인 풍습을 지닌 거인 괴물에게 포로로 잡혔다. 꼼짝없이 잡아먹힐 판이다.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괴물이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물었다. 오디세우스는 본래 이름 대신 우데이스라 답했다. 우데이스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괴물이 술에 취해 잠자는 사이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군 거대한 나무 꼬챙이로 괴물의 눈을 찔렀다. 도움을 청하려고 괴물이 소리 질렀다. “우데이스가 나를 찔렀다.” 하지만 다른 괴물은 긴박한 외침을 “아무도 나를 찌르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오디세우스가 나를 찔렀다”는 SOS 신호로 들리지만 “아무도 나를 찌르지 않았다”는 그저 술주정 같다. 오디세우스는 꾀를 써서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

국립인 어떤 기관의 전시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전시물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앞으로 갔다가도 타인을 배려해 곧 뒤로 물러났고 감상을 나눌 때도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곤댔다. 매우 인기 있는 전시여서 관람객이 많았지만 번잡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의 있는 공간이었다. 단 한 명의 사람에 의해 밀도는 높았음에도 고요하기만 했던 그 아름다운 모순된 상황이 끝났다. 그 사람은 뒤에 관람객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진열장 앞을 한참 동안 점령했고 사진을 찍는다며 위아래 좌우로 종횡무진 오갔다. 그 사람이 다음 전시물로 건너가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관람의 평화를 회복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노라면 역주행하여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전시했다. 모든 움직임엔 “나는 이래도 괜찮아”라는 가상의 말풍선이 따라다니는 듯했다.

공적 공간에서 성인이라면 누구나 지키는 상호작용의 기본원리는 그 사람과 무관했다. 그 사람은 공간을 거리낌 없이 넓게 썼고 한 번도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인 듯 큰 목소리로 게다가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사람을 피했다. 냄새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피하는 사람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당신이 왜 피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마지막 전시장에서 그 사람에게 관람 예절을 지켜달라는 당부이자 경고를 전해달라고 스태프에게 부탁하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물었더니, VIP라고 답했다.

VIP는 이름이 아니다. 직함도 아니다. VIP는 이름과 직함을 숨길 필요가 있을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름과 직함을 숨겨야 마땅한 경우가 있다. 중요한 공적 인물의 경우 공공장소에 등장할 때 이름과 직함이 숨겨져야 안전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을 경호상의 이유로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VIP라 부를 때가 있다. 자신을 우데이스로 부르게 했던 오디세우스의 행동을 긍정으로 평가하면 오디세우스는 꾀돌이지만 부정으로 평가하면 그는 술수 내지는 수작을 부렸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을 VIP라 부르는 것은 호칭으로 은폐와 엄폐를 수행해 신변보호를 하려는 일종의 꾀다.

의전 혹은 경호를 위한 꾀부리기 호칭으로 시작된 VIP가 맥락을 상실한 채 남발되기 시작하면 술수 내지는 수작으로 바뀐다. 백화점에서 일정한 기준 이상의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을 VIP라 부른다. 소비의 크기로 사람을 분류하고 특정한 사람에게 특권을 주는 백화점의 처사에 시니컬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지만 백화점의 사람 분류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비록 더 많은 물건을 팔려는 술수로 VIP라는 호칭을 남발해도, 백화점은 사기업이 운영하는 영업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적 공간이라면, 국립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공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왕립, 즉 로열에는 특권과 시혜의 의미가 들어가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민주공화국인 한국에 왕립 기관은 없다. 한국에서 로열은 한 호텔(로얄)의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국립은 다르다. 국립의 기반이 되는 민족 혹은 국민은 어떤 차별도 용납할 수 없는 수평의 개념이다.

VIP는 본래 매우 중요한 사람, 즉 Very Important Person의 약식 호칭이다. 냄새가 나지 않음에도 모두가 피했던 그 사람, 스스로 VIP라 생각하는 사람은 국립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람(very ignorant person)이자 공적 공간에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very impossible person)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적어도 국립 기관 안에선 우리 모두가 중요한 사람이다. 공공 공간에서 자신만의 권력과 특권을 전시했던 그 사람은 자신을 VIP라는 호칭도 모자란 VIP 중의 VIP, 즉 VVIP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VVIP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사람의 행동은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우 VIIP스러웠다. VIIP는 그 사람에게 적합한 아주 특별한 호칭인데, 매우 무식하고 구제불능인 사람(very ignorant and impossible person)이라는 뜻이다. VIIP를 한국어로 실감나게 옮기면 진상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진상을 만났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19.08.27

/ 2022.05.1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