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코로나 블루' 반성문 (daum.net)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코로나 블루’ 반성문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독일에서 보낸 유학시절 내내 향수에 시달렸다. 그런데 ‘향수’라는 단어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제대로 담기는 것 같지 않았다. 향수는 애잔한 정서인데, 애꿎게도 좋은 냄새를 내는 액체를 의미하는 향수와 발음이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독일어 단어 Heimweh를 알게 되었다. 고향이란 뜻의 Heim과 고통을 의미하는 Weh가 결합해 고향에 가지 못해 생긴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와 정반대의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도 있다. 고향에 가지 못해 생긴 우울함이 아니라 먼 곳(Fern)을 향한 동경을 뜻하는 Fernweh라는 단어이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나는 Heimweh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어감을 알아챘는데 Fernweh로 표현되는 감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는 중산층이 되었고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행할 수 없는 아쉬움이 깊어지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 가지 못해 생긴 불편함을 ‘코로나 블루’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단어를 SNS에서 처음 접하자마자 독일어 단어 Fernweh가 떠올랐다. 그리고 가난한 학생 시절엔 알지 못했던 Fernweh의 어감을 깨달았다.
직업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여행으로 풀면서 견뎌내던 사람이 적잖다. 나도 그랬다. 마치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려 돈을 버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적잖은 돈을 여행에 썼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행은 떠날 수 없었지만 월급쟁이인지라 월급은 꼬박꼬박 정해진 날에 통장에 입금되었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강화해도 온라인 수업이라는 출구가 가능한 직업이기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월급쟁이 중산층인 내가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며 투덜대고 자칭 타칭 ‘석학’들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코로나 이후 사회에 대해 하나마나한 소리에 가까운 공허한 내용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는 영리하게도 사회의 약한 곳,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나 같은 월급쟁이 중산층이 ‘거리 두기’를 강화하겠다고 온라인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했더니 코로나바이러스는 택배물류센터에 스며들어 집단감염을 일으켰다. 재택근무하기에 충분한 주거 공간을 가진 중산층이 집단감염을 피해 각자의 집에서 일하며 ‘코로나 블루’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는 콜센터로 노인요양시설로 퍼져 나갔다.
모두가 종류도 같고 크기도 동일한 고통을 겪는 듯 보이지만 고통의 구체적 양상은 지극히 다르다. 재난으로 인한 위기의 결과는 언제나 계층적이다. 원격 근무가 가능하며 월급을 받는 직업 종사자는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밤 9시 이후엔 식당을 나와야 하며 여행하지 못해 생기는 우울감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일을 해내야 하는 의료진과 경찰관, 소방관, 택배업 노동자는 배가된 노동 강도와 피곤함으로 고통을 겪는다.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거나 물리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었기에 손님이 뚝 떨어진 영세자영업자는 생계를 위협받는 고통을 겪는다. 집이 없는 사람에게 물리적 거리 두기를 위해 집에 머물러 달라는 호소는 공허하기만 하다. 설사 거주공간이 있어도 국토교통부가 정한 1인 가구 최저주거기준인 14평방미터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stayhome이라는 해시태그에서 중산층은 모르는 무게를 느낀다.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설에 집단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집단감염으로 생명이 위중한 상태로까지 내몰린다.
‘코로나 블루’는 생명과 생계가 위협받음으로써 생기는 고통을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단어이다. SNS에서 워낙 많이 사용되어 마치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이 ‘코로나 블루’에 담길 수 있다고 착각했지만, ‘코로나 블루’는 지극히 SNS를 통해 과잉 대표되고 있는 중산층 편향의 체험이 담긴 말 그릇에 불과하다. 이 글은 코로나로 인한 고통을 ‘코로나 블루’라고 일괄 포장했던 나라는 중산층 월급쟁이가 칼럼의 형식을 빌려 쓴 중간 반성문이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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