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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양서조처럼 살아야만 했던 사람

푸레택 2022. 5. 9. 20:11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양서조처럼 살아야만 했던 사람 (daum.net)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양서조처럼 살아야만 했던 사람

[경향신문]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공간 이동을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정복, 추방, 망명, 납치, 출장, 여행 등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간 이동이 한 사람의 인생 궤적에 새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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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양서조처럼 살아야만 했던 사람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공간 이동을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정복, 추방, 망명, 납치, 출장, 여행 등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간 이동이 한 사람의 인생 궤적에 새겨져 있는 사례가 있다.

 

1486년에서 1488년 사이에 현재의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람은 1492년 에스파냐의 기독교 지역 재정복운동으로 이슬람 그라나다가 위기에 처하자 지중해 건너 현재 모로코의 페스(Fez)로 이주했고, 1518년 카이로에 술탄의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스페인 해적선에 나포되어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지고,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서 1520년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1526년 아프리카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이자 여행기인 《아프리카 우주 지리지》를 완성하여, 그는 기독교 지역에서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나, 1527년 암중모색하던 귀향길에 올라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으로 삶을 살았다. 북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알하산 알와잔이었는데,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며 유한나 알아사드로 개명했다. 그는 유럽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로 아프리카에 관한 책을 써서 아프리카를 알린 아프리카 사람 레오 아프리카누스이며,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위장한 이슬람교도인지 의심스러운 유한나 알아사드, 이슬람교도에게는 기독교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알하산 알와잔이다.

그 남자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는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이슬람 세력에 함락되었다. 1492년 기독교 세력은 그라나다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았다. 유럽의 동쪽에서 이슬람이 승리하고, 서쪽에서 기독교가 승리하는 동안 각 진영의 내부에서는 하위분열이 일어나 루터는 가톨릭에 반기를 들었고 오스만튀르크는 페르시아의 시아파와 시리아와 이집트의 수니파 군주를 정복했다. 양 진영이 이렇게 패를 갈라 죽을 듯이 싸우고, 다시 각각의 패가 또 다른 패로 나뉘어 싸우던 기간에 이슬람 지역과 기독교 지역을 오가야 했던 이 남자는 자신을 양서조(兩棲鳥)의 처지에 빗대었고 양서조처럼 살겠다고 했다.

양서조는 땅에서도 살고 물에서도 사는 새이다. 본래 그 새는 새들과 함께 살았으나, 새의 왕이 세금을 내라 하자 물고기가 사는 물로 갔다. 물고기의 왕이 세금을 내라 하자 그 새는 다시 새의 편이 되었다. 겉으로 보면 양서조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속한 진영을 바꾸는 철새의 전형처럼 보인다. 이 남자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양서조라는 외양 속엔 단순히 철새의 전략이라 몰아붙일 수 없는 내막이 숨어 있다. 그는 누구의 편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하며, 자신이 속한 편이 조금이라도 불편할 수 있는 의견을 제기하면 적대적인 다른 편에 투항했다고 의심받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서로를 악마화하는 기독교 지역과 이슬람 지역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새가 사는 세상이 물고기가 사는 세상으로 변하면, 새가 사는 세상에서 겪은 권력자의 횡포가 없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끌려가보니 하늘을 나는 새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완전히 다를 것이라 예상했던 세계가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목격했다.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절대적 차이가 아니라 유사 상동성을 곳곳에서 경험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단지 모시는 신의 이름과 교리만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신을 절대화하고 저쪽의 신은 악마화하며 일관되게 적대적이었던 두 편은 그로테스크하게도 동일했다. 저쪽에만 있는 줄 알았던 유곽이 이쪽에도 같은 크기로 아니 그 크기 이상으로 발견되었을 때 그 남자는 양서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쪽에서도 권력을 손에 쥐고, 옮겨간 저쪽에서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은 채 단지 편만 바꾸는 철새가 아니라 양쪽 모두의 권력의 횡포에 맞서 살길을 찾아야만 했던 양서조이다. 그런데 아는가? 철새는 물고기의 세상이 더 이상 아니라고 양서조에게 노래를 강요하는데, 모시는 패가 바뀌었는데도 처지가 변하지 않은 양서조는 노래하지 못하고 울고 있음을.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