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길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가지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

푸레택 2022. 5. 9. 19:56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가지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 (daum.net)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가지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

[경향신문] 야스퍼스는 그 시대에 주목했다. 중국에서 공자·노자·묵자가, 인도에서 우파니샤드의 현자 야지나발키아와 붓다가, 페르시아에서 자라투스트라가, 팔레스타인에서 엘리야·예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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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가지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야스퍼스는 그 시대에 주목했다. 중국에서 공자·노자·묵자가, 인도에서 우파니샤드의 현자 야지나발키아와 붓다가, 페르시아에서 자라투스트라가, 팔레스타인에서 엘리야·예레미야·이사야가,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동시에 등장했던 그 독특한 시대 말이다. 그는 이 동시성의 특별함에 주목하여 ‘축의 시대’라 명명했다. ‘축의 시대’를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이 동시성을 알지 못했다. 중국과 페르시아는 서로 분리된 별도의 세계라 할 만큼 왕래가 없었다.

축의 시대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전 세계적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수십억의 사람이 지구적 동시성을 공포로 감지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우리의 공포는 나의 문제만도, 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문제만도, 내게 국적을 부여한 국민국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류는 물론 전쟁에서도 대규모의 동시적 운명에 빠져본 적 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전쟁은 지역의 성격을 벗어나 지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동시적 공포 감지라는 점에서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동시성의 시대를 열었다. 1873년 세계일주를 하는 데 80일이면 가능하다는,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쥘 베른은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담았다. 2020년 2월12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불과 약 한 달 후인 3월13일 WHO는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유행, 즉 팬데믹을 선언했다. 바이러스는 한 달 만에 세계일주를 해낸 것이다. 1873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을 읽었다.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미국 군인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은 전쟁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각자 무엇인가를 가지고 다니는 군인을 묘사한다. 군인들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들 이외에 무엇인가를 별도로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의미 있는 것이고 기억하고 싶은 그 무엇이고,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지미 크로스 중위는 한 소녀의 편지를, 노먼 보커는 일기장을, 기관총수 헨리 도빈스는 전투식량을, 위생병 랫 카일리는 만화책을, 카이오와는 신약성경과 사냥용 손도끼를, 겁이 많았던 테드 라벤더는 진정제를, 무전병 미첼 센더스는 콘돔을 가지고 다녔다. 오브라이언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짊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행위에는 부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가지고 다녔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이동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숙주 인간과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 바이러스는 외계 침략자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바이러스는 우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다. 단지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속할 뿐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이후 우리가 흔히 관광이라고 부르는 공간 이동은 흔해졌다. 관광이라는 시각적 쾌락을 위해 우리는 이동하고, 필요한 물건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우리가 가지고 다닌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다닌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우리가 가지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이동은 중단되었다. 이동이 중단된 지금, 여행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가지고 다녔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바이러스 말고도 또 무엇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본다. 당신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나는 알아본다는 우쭐함, 국경을 넘을 때마다 국민국가 간 평균소득 차이에서 비롯된 물가의 차이를 통해 마치 부자가 된 듯한 착시적 우월감, 한국에서 비싼 물건을 현지에서 싸게 샀다는 다소 속물적인 쾌감,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내가 여행이라는 이동을 하며 가지고 다녔던 것들 중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0.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