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대면은 가르치고, 비대면은 못 가르치는 것 (daum.net)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대면은 가르치고, 비대면은 못 가르치는 것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여행이라는 명사와 결합할 수 있는 동사는 꽤 많다. “여행을 하다”는 왠지 밋밋하다. “여행을 가다”는 강렬하지 않다. 여행이라는 명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사는 ‘떠나다’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하다”나 “여행을 가다”보다는 “여행을 떠난다”고 표현해야 여행의 분위기가 살아난다. ‘한다’와 ‘가다’는 일상이 여행에서도 계속됨을 연상케 한다면, ‘떠난다’는 일상과 여행 사이에 아주 굵직하고 무게감 있는 단절을 만들어준다. 그 단절감 때문에 나는 여행이 좋다.
1인 가구로 살기에 이른바 가사노동은 내 몫이다. 청소, 장보기, 요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쓰레기 버리기, 세탁, 다림질, 침구정리를 대신해줄 사람은 없다. 밖에 나가면 돈을 벌기 위한 임금노동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가사노동을 한다. 두 가지 일을 다 해내야 하지만 아직까지 단 한 시간도 가사노동을 남에게 임금노동으로 맡겨본 적이 없다. 언젠가 아주 늙어 기력이 없어지면 그때는 별수 없이 남의 임금노동에 의존해야 할 테니 적어도 손발을 놀리는 데 지장이 없는 한 가사노동을 직접 하자는 소박한, 하지만 나름은 철저하게 지키고 싶은 원칙을 세웠고 잘 지켜오고 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안 하면 반나절 만에 티가 나지만, 반나절을 가사노동에 써도 집은 그냥 그 집이어서 사람을 허탈하게 만든다. 시시포스의 형벌이 다른 게 아니다.
시시포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여행이 유혹한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집을 떠나자, 그리고 이 시시포스의 고통에서도 벗어나자’고 결심한다. 여행을 떠나면 시시포스의 고통이 사라진다.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은 임금노동으로부터의 잠깐 동안의 해방을 뜻하지만, 가사노동에 지친 사람에게 여행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인생을 괴롭히는 고통의 듀엣으로부터 비록 한시적이라도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만 생각하면 여행을 떠나면서 설레지 않을 재간이 없다.
여행을 떠나 어디에서 묵을지 결정할 때 가사노동과 무관한 삶을 산 사람은 집과 비슷한 환경의 숙소를 선호한다.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의 협공에 질려서 피신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집에서 확실하게 떠난 느낌을 주는 숙소에 머물고 싶어 한다. 나는 그런 이유로 대개의 경우 호텔을 선택한다. 호텔에 머물러야 가사노동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할 필요도 없고 쓰레기통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 세탁 걱정 없이 수건을 쓰고 세탁이 필요한 수건은 욕실 바닥에 던져 놓으면 된다. 외출하고 다시 돌아오면 호텔 방은 집과 완벽하게 단절된 느낌을 주는 상태로 정돈되어 있다. 깔끔하게 다림질 자국까지 선명한 이불 시트로 마감한 ‘베딩’은 집에 없다. 호텔식으로 정리된 침구를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집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샤워를 했는데도 욕실은 물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뽀송뽀송한 상태로 변해있고 두루마리 화장지 끝도 예쁘게 접혀 있다. 완벽한 단절이다. 나는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여행지에서 한 호텔에 장기투숙한 적이 있다. 크지 않은 호텔이었기에 며칠 지나지 않아 스태프의 얼굴을 다 익혔다. 여행을 떠났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받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호텔 객실을 정돈하는 사람의 얼굴도 알게 되었다.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치기 전엔 여행을 떠나온 느낌을 만끽하겠다고, 밤새 뒤척인 흔적이 적나라하게 새겨진 이불을 구겨진 상태로 그냥 두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익히고,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며 말도 섞게 되자,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침대를 정리했다. 그분이 오실 시간이 가까워지면 황급히 수건을 고이 접어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서로 얼굴을 알고 말을 나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대면은 나로 하여금 여행지에서 느끼는 일상으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대면은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부끄러움은 윤리적 감각의 토양이 된다. 코로나 시대 유일한 대안이라고 자본이 칭송하는 언택(Untact)은 예외적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언택은 부끄러움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언택은 눈길을 주지 않고 대면하지 않은 그 누군가의 임금노동이 있기에 가능하다. 언택을 가능하게 하는 새벽배송은 로봇이 하지 않는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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