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서점으로 떠나자 (daum.net)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 서점으로 떠나자 /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김기림의 시집 《태양의 풍속》은 1939년 출간되었다. 꽤 오래전에 쓰인 시이지만 ‘세계는/ 나의 학교/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나는 수없는 신기로운 일을 배우는/ 유쾌한 소학생’이라는 구절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행을 준비하며 짐을 꾸릴 때면 늘 이 시구가 떠오른다.
여행을 떠난 ‘유쾌한 소학생’은 여행지에 도착하면 어디로 갈까? 사람마다 가고 싶은 곳이 다를 것이다. 잘 알려진 표현 ‘무엇을 읽는지가 당신을 말해준다’(You are What you read)를 살짝 ‘여행의 목적지가 당신을 말해준다’(You are Where you go)로 바꾸어본다. 그리고 허균을 떠올려 본다. 그는 1616년 북경에 갔고 그곳에서 이런 시를 썼다. “고향집 왜란 겪고 고서를 다 잃어, 세상에서 보지 못한 책 얻고 싶을 뿐, 여기 와 산 책이 몇 만 권이니, 등불 아래서 글 읽을 만하네.” 허균은 그해에 1만5000냥을 들여 책 4,000권을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그런 허균이니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라고 시에 쓸 자격이 충분하다.
1765년 홍대용도 북경을 향해 떠났다. 북경의 유명한 저잣거리인 유리창(琉璃廠)에서 홍대용은 서책 포자(鋪子), 즉 서점부터 찾아갔다. 홍대용이 매료당한 유리창의 서점은 이런 모습이었다. “삼면에 층층이 탁자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두세 길이고, 칸칸이 서책을 가득히 쌓아 책갑마다 종이로 쪽지를 붙여 이름을 표하였다. 대개 경서와 사기와 제자백가의 책이 없는 것이 없고, 그중 듣지 못하던 이름이 반이 넘었다.”
세월이 흘러도 여행을 가면 서점부터 들러야 하는 사람의 계보는 쭉 이어진다. 1936년 김기림이 있던 동경으로 간 이상은 짧은 동경 기행 산문을 남겼는데, 동경 기행의 절반은 카페 순례이고 나머지 절반은 서점 순례이다. 그가 동경에서 어디로 갔는지를 살펴보면, 이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썼다. “코롬방의 차(茶) 기노꾸니야의 책(冊)은 여기 사람들의 교양(敎養)이다.” 중고서점 거리 진보초에 그가 가지 않을 리 없다. “나우카(NAUKA)사(社)가 있는 진보초 스즈란도에는 고본 야시(古本夜市)가 선다. … 이슬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량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의 이십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사천자라는 서적을 샀다.” 이상은 없는 돈에도 불구하고 책을 샀다.
김기림과 허균, 홍대용 그리고 이상을 읽은 때문인지 새로운 도시에 가면 그 도시의 서점에 반드시 들른다. 꼭 유명한 서점이 아니더라도 발품을 부지런히 팔다보면 우연히 괜찮은 서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폴리의 ‘단테와 데카르트’ 서점이 그랬다. 산타 키아라 수도원으로 가던 길에 광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특이한 이름의 서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홀린 듯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 읽을 줄도 모르지만 이탈리아어판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샀다.
새로운 도시에 가면 서점에 가서 그 도시를 기억할 수 있는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관광객에게 점령당한 포르투의 넬루서점에서는 다소 실망했지만, 리스본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점은 알고보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베르트란드(Bertrand) 서점이었고, 거기에서 영어로 된 페소아 책과 읽지 못하면서도 포르투갈어로 쓰인 조제 사라마구의 책을 샀다.
한국이라고 그런 서점들이 왜 없겠는가. 서울과 제주에는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도시 속 여행을 유혹하는 개성 있는 서점이 있다. 그뿐이랴. 속초에는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림’ 그리고 ‘완벽한 날들’이 있고, 전주에는 ‘잘 익은 언어들’, 군산에는 ‘한길문고’와 ‘마리서사’, 구미에는 ‘삼일문고’, 부산에는 ‘주책공사’와 ‘책방 한탸’가 있다.
최근에 읽은 책 《우리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간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고통을 받는 분들이 문화예술 종사자입니다. … 하지만 책을 읽는 일은 안전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삼가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는 방법이 있음을 몰랐었다. 어느 서점으로 여행을 떠날까? 여행 전날의 설렘을 간만에 맛본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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