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⑮ 공간 - 도시가 아니라 집이다 (daum.net)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⑮ 공간 - 도시가 아니라 집이다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잠만 자던 집은 일·사교·운동 등 보다 많은 기능을 가져야 한다.
더 많은 요구를 더 넓은 공간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이제 모순이다.
시간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렴하고, 집에서 자연의 변화를 수용하는
韓 전통주거 전일적 세계관을 통해 팬데믹의 내면을 확장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주거라 함은 주로, 14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왕조인 조선의 문반과 무반의 집을 대상으로 한다. 당시의 주류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으로서 인간과 자연을 기(氣)와 리(理)로 설명하고자 했다. 리는 우주의 보편적 법칙이고, 기는 물질이 성립하는 근본적인 토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나눠서 생각하지 않는 통합적 성격이 짙었고 자연스럽게 성리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기계공학자이자 철학자였고, 문학과 미술, 음악에 정통했으며 생물학자였고 정원사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상을 오래 관찰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속성을 정확히 파악해서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거기서 근본적인 원리를 추출해냈다. 당연히 그들이 살았던 집은 연구소이자 세미나의 장소였고, 극장이었다.
한국의 전통 주거, 즉 조선 사대부의 살림집은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핏 각각의 기능에 따른 개별적인 공간을 갖는 방식이 손쉽게 떠오르지만, 그것은 너무 많은 비용과 자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각각의 기능에 따른 개별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 대신에, 하나의 공간을 두고 각각의 기능에 따라 시간을 쪼개서 쓰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면, 침실, 거실, 식당, 서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방에서 시간에 따라 각 기능을 전환시키는 방법-나는 지금도 서재에서 잠을 자고, 손님이 오면 같은 공간에서 맞이하고 심지어 거기서 밥도 먹는다―은 사실 그들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수 천 년 동안 한국의 주거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집은 그 공간을 규정하는 특정한 성격이 없어야 했다. 한 공간이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들을 수용해야 하므로 공간에 명확한 성격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했다. 사실 한 가지 기능에 하나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입자 쪼개듯 나누어서 각각에 적합한 공간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합리성의 착각이다. 근대는 이 착각을 전지구적으로 확장했다. 그 결과가 공간의 효율을 강조한 고밀도 도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쿠퍼는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구절을 남겼다. 시인이 살았던 18세기에는 산업혁명의 급박한 변화 속에서도 도시 거주비율이 전체인구의 5% 이내였다. 그러나 2018년 한국의 도시 거주비율은 91%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 10만㎢의 약 16.7%가 도시지역으로, 약 1만7천㎢에 4700만 명이 몰려 살고 있다. 만약 감염과 전염으로 퍼지는 질병이 유행한다 하더라도 나타났다 사라지기만 한다면 어떤 질병도 도시 자체를 크게 위협하지는 못한다. 이제까지 질병으로 완전히 사라진 도시는 거의 없었다. 예로부터 인류를 위협한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천연두, 흑사병, 인플루엔자가 있었지만 이들이 한 도시를 멸망하게 한 일은 없었다.
14세기 동방 무역의 거점이던 이탈리아의 제노바는 터키와 그리스, 지중해의 여러 섬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항구를 봉쇄했다. 흑해 연안을 떠돌며 무역을 하던 배들은 프랑스 마르세유로 갔고, 거기서 다행히 입항허가를 받았다. 그때가 1347년 11월 경이었다. 마르세유는 초토화됐고, 흑사병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까지 번지며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4분의 1가량인 7500만 명에서 최대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지금 그 도시들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건재하다. 왜냐하면 도시에는 아무리 엉터리 같은 치료법이라고 하지만 당대의 다양한 의학 지식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다양한’ 의학 지식들이 거의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차별하게 적용됐고, 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거기에서 얻은 지식도 컸다.
과거의 팬데믹은 ‘신의 재앙’으로도 불리고 ‘개벽의 운수’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인류는 아직 팬데믹의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도시는 그때와는 다르다. 더 밀집해 있고, 더 커지고, 공공의 이익과 그에 따른 인권의 문제, 어떤 사안에 따른 제도적인 문제도 더 촘촘해졌다. 설사 누군가 백신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용되기에는 많은 복잡한 절차들이 따른다. 그리고 그 절차들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신속하게 승인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지금 우리는 질병의 원인도 정확히 알고 있다. ‘인류세’라고 칭할 정도로 팽창한 인간 문명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원인을 안다고 우리가 곧바로 그것을 막기 위한 실천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 실천은 전염병보다 더 무섭게 지금 당장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현대도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다. 팬데믹은 이 합리성과 효율성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것들 스스로가 거기에 구멍을 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기후변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간빙기는 11,400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이 많은 소빙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인류는 거주의 변화와 전쟁, 기근을 겪었고 심지어 육체의 변화까지 겪었다. 17세기 유럽에 닥친 소빙기는 16세기 말과 비교해 기온이 1.3도 정도 낮았고, 그로 인한 기근과 농작물의 감소로 사람들의 키가 2㎝ 정도 줄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불황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건축에서도 추운 날씨로 긴 창이 작아지면서 고딕의 시대가 끝나고 바로크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파리, 런던, 뉴욕, 베이징, 도쿄, 서울,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 등 지구상 어디에도 비슷한 모습의 도시를 만든 것도 사실은 불과 몇 도의 온도 차이가 만들어낸 산업혁명의 결과였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화 시스템은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고, 엄청난 물류들이 도시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자리들이 만들어졌고 기근으로 농토를 버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소위 ‘근대’는 도시 살기의 매뉴얼이었다. 그 매뉴얼에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는 근대건축의 가장 유명한 선언 중에 하나가 나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산업혁명시대보다 약 1도 정도 높은 기온에서 살고 있다. 그 1도는 과거와 달리 인간이 만든 온도였다. 이 온도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그룹에서 여러 가지 제안을 내놓고 있다. 녹지공간의 훼손, 대기 및 수질오염, 교통 혼잡, 교외 지역의 난개발 등을 방지하고, 양호한 농경지와 오픈스페이스를 보존하는 스마트성장(Smart Growth)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가 하면, 직경 2.66km의 8층 건물에 인구 25만 명을 수용하여 이동 거리를 줄이고 에너지 소비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압축도시(Compact City)도 있다. 그 밖에, 영국의 전통마을을 기본개념으로, 찰스 황태자와 건축가들이 함께 제안한 어반 빌리지(Urban Village)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탄소배출을 낮추거나 탄소흡수 능력을 키우는 노력들로, 기후변화의 원인을 사전에 억제하고 차단하기 위한 방안들이다. 거기에 기후변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적응해야 한다는 의견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들이 놓친 것이 있다.
기후 온난화로 영구동토지대가 녹고 있다. 이 사실이 심각한 이유가 땅속에 얼어있던 상태로 몇 만 년을 유지해 오던 동물의 사체가 썩으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고생대의 바이러스가 지금 계속해서 창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지를 넓히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나무로 인한 증발산(evapotranspiration) 때문에 습도가 증가하고, 광합성 과정에서 방출되는 휘발성유기화합물(BVOC)이 오존을 증가시켜 대기를 오염시키는 문제도 따라온다.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티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거리도 둬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해체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의료시스템이 도시에 몰려 있는 한 도시의 종말은 먼 이야기일 것이다. 또 인구가 감소하는 만큼 일인 가구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활력, 즉 극장, 쇼핑, 유통, 교육, 스포츠, 전시, 유흥, 기타 편의시설 등이 사라지거나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면 이제까지 밖에서 하던 일들이 집안으로 옮겨 오면서 집(Home)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제는 도시가 아니라 집이다. 잠만 자던 집은 일과 사교, 운동 등 보다 많은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요구를 더 넓은 공간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제는 모순이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적어도 인간의 경계를 스스로 제한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전통주거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렴하고, 집을 통해서 자연의 변화를 수용하는 전일적 세계관과 관계중심적 사고를 통해 팬데믹의 내면을 확장해야 한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 절실하다.
건축가 함성호
함성호/건축디자인실험집단 EON 대표이자 199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시인. 조선 성리학자들이 지은 건축물을 답사한 ‘철학으로 읽는 옛집’, 공간 예술에 담긴 사회적 담론을 분석한 ‘반하는 건축’ 등 다양한 책을 집필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팬데믹’은 도심 공원의 접근성 향상, 온라인 소비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물류 전용터널 설치 등 다양한 ‘건축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독일 건축가와 도시 개발자가 쓴 ‘도시의 미래’(와이즈맵)는 인구밀도·기반시설·생태계 등 11개 키워드를 통해 미래 도시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건물 전면에 있는 숲이 건물의 냉방 시스템을 담당하고, 지하 농장이나 옥상 농원이 식량을 공급하며, 이동수단 발달로 개인 소유 차량이 급감하면서 빈 도로가 공원으로 채워지는 도시를 이상적인 공간으로 제시한다. 숲이 건물을 뒤덮은 밀라노의 ‘보스코 메르티칼레’,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다기능 인공 나무인 싱가포르의 ‘슈퍼 트리’ 등 실제 사례를 통해 미래 도시가 실현 가능한 제안임을 설득한다.
문화인류학자 질베르 리스트의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 책)은 친환경적 도시 설계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책은 ‘발전’이 풍요를 안겨줄 것이라는 맹목적 신앙을 공격하면서 프랑수아 페로, 더들리 시어스, 종속학파 등 ‘발전 신앙’의 극복을 시도한 담론들을 소개한다.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을 초래한 ‘발전’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하는 저자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막다른 길을 다시 측정하자”고 제안한다.
나윤석 기자ㅣ문화일보 2021.01.18
/ 2022.03.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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