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⑬ 산업혁명 넘어 돌봄혁명으로 (daum.net)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가정·의료전선·노동시장서 위기에 처한 여성
천연자원처럼 착취당해온 ‘돌봄’도 위기… 사회적 위기로 이어져
성장중심 세계관 근본적 재검토… ‘모두가 참여하는’ 돌봄으로
◇ 코로나 시대의 여성
코로나 시대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 가지 대표적인 사실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5월 여성들이 가정, 의료최전선,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발표했다. 유엔여성기구(UN Women)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 또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이라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코로나 시대의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섀도 팬데믹(shadow pandemic)’이라고 명명했다. 가정폭력은 특히 코로나 시대에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중첩된 상황에서 비좁고 제한된 집에 머무는 건 긴장이 높은 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가정 내 폭군들은 자신의 답답함을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을 선택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코로나는 더욱 큰 고난을 안겨줬다. 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자가격리와 재택근무는 가택연금보다 가혹한 조치였다”고 말한 바 있다.
폭력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노동과 빈곤 문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2월 이후 지난 10개월 동안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더 많이 실직했고, 가족 내에서 돌봄노동을 사실상 전담하도록 더 많은 역할이 주어졌다. 지난 7월 국제통화기금(IMF)에서는 여성들은 주로 대인서비스가 필요한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기 때문에 재택근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고, 남성보다 평균 2.7시간 더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하며, 가사노동 및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휴직할 경우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등의 내용으로 코로나 상황에서의 젠더 격차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 돌봄 서비스 제공자 대부분이 여성인 상황에서 여성의 일자리 상실은 곧 가족 내 무급노동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가 개학을 연기하면서 보육교사, 방과 후 교사 등 돌봄노동자 1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고, 기혼 유자녀 여성들은 일과 생활이 모두 뒤섞인 ‘집’을 사무공간이자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드는 동시에 가정 내 사생활의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 돌봄 위기, 여성 위기, 사회 위기
코로나 시대의 위기는 돌봄노동의 위기이자 여성의 위기로 나타났다.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들은 ‘돌봄’이라는 의제에 성차별의 구조적 문제들이 응축돼 있다고 보고,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들을 진전시켜왔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돌보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한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어도 가족 안에서 아이와 노인, 그리고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만큼은 큰 변화가 없다. 왜일까?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가족 내에서 무급으로 돌봄노동을 무한리필로 제공하는 것이 여성 특유의 ‘이타성’이라고 상찬하면서 여성의 돌봄노동을 마치 천연자원처럼 착취해왔다. 정말 여성이 더 돌봄에 적합한가? 돌봄 능력이 더 뛰어난가? 2017년 스위스 취리히대의 필립 토블러 연구팀은 여성은 ‘이타적’ 행동을 할 때 뇌에서 도파민 호르몬을 더 많이 분출하는 반면 남성은 ‘이기적’ 행동을 할 때 그렇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토블러 연구팀의 알렉산더 수첵은 이것은 생물학적 성차의 증거라기보다는 여자아이들에게는 이타적 행동이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학습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여성이 이타적으로 굴 때, 즉 타인을 돌볼 때 칭찬이란 보상이 주어져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굴자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합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여성의 경우에는 애초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등의 이기심이 허용돼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미스는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건 푸줏간 주인이나 빵 굽는 이가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 식탁을 차린 건 과연 누구였을까? 폴브레가 제안하는 것은 여자도 남자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자는 것도, 시장의 법칙을 사회 전체로 확대하자는 말도 아니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돌봄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돌봄노동을 모두 외주화하거나 시장에 맡기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돌봄노동을 외주화하고 시장에 맡기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돌봄노동의 가치를 다른 노동보다 적게 매겨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 결과 외주화된 돌봄노동자에게 모든 위험을 떠맡기면서도 이들은 고용보험의 혜택도, 필수노동자의 지위도 얻지 못하는 처지에 내몰리게 된다. 가사도우미와 아이돌보미에게 지급하는 돈보다 많이 벌지 못하는 여성은 경제활동을 하는 게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대부분이 여성인 돌봄노동자들은 임금노동을 하면서도 고용보험부터 근로계약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돌봄노동의 시장화와 돌봄노동자에 대한 저평가는 빈곤의 여성화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악순환 고리다.
그렇다면 돌봄을 공공화하면 될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돌봄을 제도적으로 공공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돌봄을 제공하고 누가 돌봄을 언제 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돌봄의 공공성은 공염불이 되기 쉽다.
◇ 산업혁명? 돌봄혁명!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신성장동력을 중심에 두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성장 중심의 발전주의 세계관을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대책으로 평가된다.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 건 필수노동자들(essential workers)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수노동이란 보건, 의료, 사회복지 및 돌봄 서비스 제공자들, 운수 및 배달업 종사자, 청소노동자 등의 중요성을 호명하는 개념이다. 나도 이 시기 동안 새삼스럽게 필수노동자들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들에게 무척 감사했다. 이 노동들의 핵심에는 무엇보다도 ‘돌봄’과 ‘연결’이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코로나 시대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류학자 백영경의 표현대로, 필수노동은 잘만 쓰면 아주 급진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돌봄노동이 필수노동으로 취급받을 때 생산과 재생산을 나누는 기존의 노동개념은 드디어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윙커는 상품형태로 생산되지 않는 가족관계 내의 노동이 무급으로 제공되는 한 자본주의도, 가부장제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위한 페미니즘 관점의 ‘돌봄혁명’을 제안한 바 있다. 비용의 절감과 성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존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돌봄을 받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의 존엄성을 핵심 가치로 두는 것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80여 개 단체와 개인이 모인 돌봄혁명네트워크(www.care-revolution.org)의 정신이다. 여기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와 출생률 증가를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는 방식의 정책에 반대한다. 돌봄혁명 없이는 이 같은 수치상의 변화가 여성의 해방으로 이어지지도, 다른 사회를 만들어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혁명 운동의 참여자들은 참여민주주의의 모델을 확장시키자고 제안한다. 돌봄의 민주화와 지역 풀뿌리 운동으로 이어지고 구체적인 일상의 변화, 예컨대 어린이집, 보건소, 주민복지센터 등은 돌봄제공 기관이기도 하지만 돌봄에 참여할 수 있는 거점이 된다. 지역사회의 보건소와 노인복지센터, 간호위원회 등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돌봄수혜자의 상태를 함께 논의할 수도 있고, 성공적인 간병 관계를 위한 상호참견방식을 합의할 수도 있으며, 양육자를 위한 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고 각자의 돌봄제공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새로운 돌봄 모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 시대에 우리는 점점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더욱 활성화해야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다. 돌봄 민주주의를 주창한 정치학자 조안 트론토는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라고 재정의하고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기반해 상호책임과 협력의 관계를 만들어나가자고 제안한다. 세계를 지속하고 유지하고 고쳐나가는 모든 노동이 돌봄노동이라면,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바로 ‘돌봄’이다. 여성만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권김현영 여성학자
권김현영/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기획연구위원. 저서로 칼럼집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와 논문집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등이 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여전히 ‘돌봄’을 노동이 아니라 사랑과 의무, 호혜의 가치를 동력으로 작동하는 행위로 여기는지. ‘돌봄노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을 꼽자면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왼쪽 사진)과 일본 소설 ‘장녀들’(오른쪽)이다. ‘보이지 않는 가슴’은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무엇이며 ‘경제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존과 다른 시선에서 설파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주류 경제학에 갇혀 있던 인식과 견고한 틀을 흔드는 것. 저자는 돌봄노동을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한 요소로 보고, 돌봄 경제학에 주목했다. 진화하는 가족 관계 속에서 가족과 정부의 관계도 달라져야 함을 제시하는 등 20여 년 전, ‘급진적’이라 평가받았던 책은 이제 ‘돌봄혁명’으로 가는 길목의 필독서다. ‘장녀들’은 20년간 치매 노모를 돌봤던 저자의 실제 경험이 바탕이 됐다. ‘돌봄노동자’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는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늘어나는 돌봄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 제도를 꼬집는 것과 이야기 속 여성들이 모두 비혼의 장녀들이라는 설정 등 초고령화, 저출산, 비혼 시대 우리 사회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다.
박동미 기자ㅣ문화일보 2021.01.04
/ 2022.03.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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