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⑪ 식물, 인간 아닌 존재와의 동거 (daum.net)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⑪ 식물, 인간 아닌 존재와의 동거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식물은 팬데믹과 더불어 인간의 생활공간에 재진입하며
집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
주거권은 인간 외 존재와 함께 생태계를 구성하는 공간에 대한 권리
주거공간은 몸이 놓이는 곳이 아닌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지 일 년이 다 돼 간다. 많은 사람이 대유행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을 걸로 본다. 일상의 감각도, 산업과 사회의 구조도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뜻일 것이다. 거리에서는 크고 작은 가게들이 사라져 갔다. 대신, 의외의 점포가 곳곳에 문을 열었다. 꽃집이다. 제철 꽃을 정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꽃 구독’ 업체들도 생겨났다. 이렇게만 보면 화훼산업은 올해 비교적 경기가 괜찮았던 분야로 보인다. 하지만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상에서는 명암이 교차했다. 각종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꽃 소비량이 크게 줄었기에, 생화 생산과 유통 종사자들에게는 매우 고된 시기였던 것이다.
반면, 열대 관엽식물들은 꽃집 사장님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했다. 내가 이따금 찾는 한 농장의 사장님은 싱글벙글한 표정을 슬쩍 감추며 사람들이 ‘무늬 아단소니’를 별 고민 없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손바닥 크기의 갸름한 잎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몬스테라 아단소니라는 식물은 흰색 무늬종이 100만 원을 호가한다. 그런데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간을 변신시켜 줄 식물에 ‘입덕한’ 사람들 역시 늘어난 모양새다.
무생물이 빼곡하게 쌓여 있는 인간의 생활공간에 자리 잡은 쨍한 초록빛 화분 하나는 녹색이 지니는 각별한 감각적 위상을 깨닫게 한다. 초록색은 신기한 색깔이다. 다른 색깔과 안 어울리게 도드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우점(優占) 색이 되면 다른 빛깔들을 너그럽게 포용한다. 한 점의 초록빛은 눈에 확 띄지만, 풍요로운 녹음은 오히려 안정적인 배경색이 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감각과 취향 자체가 식물과의 공진화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식물을 갈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은 주로 도심의 실내 녹지를 일컫는 ‘어번 정글’이나 식물로 인테리어를 한다는 뜻의 ‘플랜테리어’의 유행에서도 엿보인다. 이제는 ‘반려식물’이라는 말도 귀에 설지 않다.
식물은 팬데믹과 더불어 인간의 공간으로 재진입하면서 주거의 개념을 생각해 보게 한다. 집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주거권에 대한 주장들은 집에 대한 권리란 그저 비바람을 피할 곳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공간을 배려받을 권리라고 제시한다. 주거권을 포함한 삶의 권리 일반은 많은 경우 타자와 공존할 권리이다. 예컨대 이동권은 개인의 공간을 벗어나 타인들이 현존하는 공간을 오가며 함께 존재할 권리다. 어쩌면 주거권의 개념에도 같은 측면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고양이나 식물과 동거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단순히 개인의 경제력 및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어떤 권리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관점을 택하려면, 인간은 인간 자신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구성되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요청될 수 있다. 한 예로, 인류학에서는 2010년대부터 ‘다종민족지(多種民族誌·multispecies ethnography)’라고 일컬어지는 연구 성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분야는 인류학의 전통적 지식 대상인 인간이 다른 종과 함께 이루는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를 분석한다. 단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논문은 미국인류학회에서 발간하는 ‘문화인류학’이라는 학술지에 2010년 최초로 실렸다. 글의 저자들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실천 체계가 낳은 생태적 위기로 인해 지구상의 삶의 가능성 또는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종말론적 담론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보다 소박하고 실천 가능한 희망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다종민족지의 탄생 배경에 있다고 적는다. 사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벼나 소처럼 다른 종과 함께 살아갈 때 가능하다. 우리는 그 의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종들이 없다면, 인간은 말 그대로 헐벗은 상태여서, 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식물과의 공존은 어떻게 사람의 주거권과 연동될까. 식물 덕후인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늘 듣는 말은 이렇다. “나는 식물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선인장도 죽인다니까.” 초록별로 돌아간 식물들의 운명은 안타깝지만, 식물 집사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선인장은 한국의 주거공간에서 가장 기르기 힘든 식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강한 볕을 쬐어야 웃자라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렇게 밝은 집은 드문 편이다. 이런 경우에는 재배등을 설치해 주는 것이 좋다. 식물과 맞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간과되기 쉬운 주거공간의 실상을 드러낸다. 햇빛은 지구에 풍족하게 흩뿌려지고 있지만 식물이 양껏 먹을 수 있는 채광 좋은 집은 귀하고, 많은 사람이 볕이 잘 드는 집을 선호하지만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식물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줄 수 있을 통풍 역시 꼭 좋지는 않다. 화초는 물을 쓸 수 있는 양보다 많이 주게 되면 화분 바닥에 물이 고여 뿌리가 썩는다. 이때 물 소비량은 통풍과 관계가 깊다. 뿌리가 썩으면 물을 먹지 못하게 되니 건조와 비슷한 증세가 드러난다. 그런데, 채광과 통풍은 주거 공간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두 조건이 좋지 않으면 주거 공간에서는 산 식물보다는 죽은 식물이 자리 잡게 된다. 도시의 에테르인 전기를 소비하며 작동하는 제습기와 같은 플라스틱 가전제품들, 곧 화석화된 고대 식물의 변형태가 들어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좋다’라고 느끼는 많은 것은 인간 진화사의 오랜 세월 동안 삶의 조건이 돼 왔던, 다종적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미적 취향 및 생리적 조건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거권이란 인간 외 존재들과 함께 건강한 미시 생태계를 구성할 공간에 대한 권리인 것은 아닐까? 화분 하나 기를 수 없는 집은 어쩐지 슬프지 않은가? 주거 공간은 몸이 놓이는 곳이 아니라 삶이 이뤄지는 장소다. 이 점에서는 개인의 생활공간만이 아니라 집합적 삶이 이뤄지는 지구라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태계라는 말은 광합성 활동으로 공기와 영양소의 생산을 담당하는 식물을 맨 먼저 떠올리게 하는데, 인간의 서식 공간 일대에서 식물이 귀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화분 하나 없는 집은 드물지만, 생태계 건전성의 관점에서 보면 식물은 아무리 많아도 대개 턱없이 부족하다. ‘생태계’보다 ‘사회’라는 이름이 적절할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죽은 식물과 산다.
“모든(‘팬’, pan-) 사람에게(‘데믹’, -demos) 속한다”는 뜻이 팬데믹이라는 말의 본뜻이다. 현재의 팬데믹은 바이러스가 점령했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최초로 팬데믹했던 것은 식물이 참여해 구성하는 공기였다. 철학자 루스 이리가레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며 반드시 참여하는 공통의 영역, 보편적 공유의 영역이 공기라고 말한다. 공기는 식물이 아낌없이 내놓는 산소가 함유된, 지구상 생명의 원초적 공동체를 이루는 피다.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기초 활동인 호흡이 마스크 없이는 위험해진 현재, 서로의 호흡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숨을 주고받았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활 영역의 곳곳에 재등장한 식물들은 살기 위해 분투하며, 자신이 지상에 처음 등장한 이래 10억 년에 걸쳐 해 온 일을 묵묵히 계속한다. 호흡을 매개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워하는 우리는 화분을 우리 삶의 공간으로 초대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공통성의 영역을 재구축한다. 다시 마스크를 벗을 때 사정없이 밀려들 젖은 흙냄새와 풀 향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삶의 회복이 가능할지 상상하게 해 주는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
황희선 서울대 인류학 박사과정
황희선/도나 해러웨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등의 책을 한글로 옮겼다. 한국의 농부 및 텃밭지기들이 토종작물과 맺는 다종적 관계와 역사를 연구 중이다. 공저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등이 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팬데믹’ 위기는 인류에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정립을 요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팬데믹은 기후변화를 무시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경고”이기 때문이다.
‘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궁리)는 생태학자인 저자가 초록동색·각자도생·고군분투·도광양회 등 24개의 사자성어를 뽑아 인간 사회와 식물 생태계를 고찰한다. ‘서로 사랑하기’ ‘모두 함께 살기’ ‘끝내 살아남기’ ‘다시 돌아보기’ 등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식물 생태계는 인간 세상보다 더 정직하고 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환경 전문 변호사가 쓴 ‘자연의 권리’(교유서가)는 근대 법체계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자연과 동물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적 혁명’을 통해 인간을 ‘정복자’가 아닌 ‘생명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 중에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코리브르)을 다시 들춰볼 만하다. 1962년 출간된 이 책은 화학 살충제가 실제로는 생태계를 참혹하게 파괴한다는 점을 생생하게 고발해 이후 환경운동의 패러다임이 일대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나윤석 기자ㅣ문화일보 2020.12.14
/ 2022.03.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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