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⑭ 사생활 - 침해받지 않을 자유 (daum.net)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⑭ 사생활 - 침해받지 않을 자유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방역차원이라며 드러내선 안될 개인정보 공개
주변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상세
세상엔 공개돼야 할 사생활이란 없어
코로나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 무너져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던 2000년대 중반, 지하철 앞에서 무가지를 배포하는 일을 병행했다. 6~7시에 배달이 끝나면 오토바이를 역 근처 모퉁이에 세워두고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신문을 손에 쥐어줬다. 하는 일의 연장선에서 잠시 초과근무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이었으니 제법 효율적이었다. 이 모습을 누가 보았다. 매일 수백 명과 만났으니 당연했다. 친척과 친구를 만났다. 서먹했다. 학교에서 만날 사람과 마주치는 건 어색했다. 놀라는 표정을 짓는 이들에게 나는 ‘네. 당신이 아는 사람이 맞아요. 그런데 모르는 척하죠’라는 눈빛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일을 한다고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다. 수백 명이 다니는 외부에 있었으니 알 사람은 다 알았겠지만 나는 내 외부로 이 정보가 나가지 않았으면 했다. 부끄러움 따위 때문이 아니다. 폭설 때문에 배달이 늦어진 날에는 00일보라고 적힌 유니폼 외투를 입고 수업을 들어갔으니 내가 어떻게 학업과 공부를 병행하는지는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압박감이 있었다. ‘공부하면서 힘들게 사네!’라는 격려와 ‘공부는 언제 하냐?’라는 조롱이 갈라지는 경계선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저 ‘구별짓기’에서 상류층만의 문화향유가 계층이 구별되는 새로운 요소임을 증명한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라는 주장은 사라졌지만, ‘살아가는 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동체가 여전히 위아래로 엄격히 구별 지어진다는 부르디외의 진단은 현대인들의 ‘차별 욕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학원이란 공간에는 특정한 계층의 생계형 밥벌이가 얼마나 비루한지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는 사람들의 편견이 ‘지성’이란 단어로 둔갑된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계층이 섞인 곳에서, 특히 엘리트라는 삶의 궤적을 지내는 이들에게 누군가의 생계는 무례한 분석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동정심은 접해보지 않은 계층의 삶을 신기하게 바라볼 때 잠시나마 등장한다. 결국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니 새벽에도 일을 한다는 사람이 추가 노동을 한다는 건 학업을 부차적으로 생각한다는 냄새를 대학원 공동체에 풍기는 것에 불과했다. “왜 대학원에 온 거야?”라면서 빈정거리는 이들의 표정을 볼 자신도 없었으니 나는 공개된 것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몰라준 지인이 있었다. 눈치도 없이 지하철 출구에서 “이런 일까지 하냐?”면서 위로하고 무안하게 커피도 주던 그 사람은 (자세히는 밝힐 수 없고) 대학 관계자였는데 일절 상의 없이 내가 모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새벽엔 신문 배달, 아침엔 무가지 배포, 저녁엔 야간대학원에서 조교로 근무한다고 상세하게 밝히며 추천을 했다. 수여식장에서 지인은 내 삶의 비루함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이 장학금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말하기 바빴다. 대강 ‘이런 인간이 공부까지 하니 기특하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은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는 사람의 행복감에 도취되었지만 난 동물원에 전시된 멸종위기의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그 대가는 불과 100만 원이었지만 내게는 자존심을 충분히 눌러버리는 무게감 있는 금액이었다. 나는 양복 입은 아무개와 악수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불쌍한 이를 어여삐 여겨 주심에 감사한다는 표정과 겸손한 자세로.
공개되어도 괜찮을 거라 여겨지는 누군가의 일상들이 있다. 사생활이 아니라고 여겨서다. 사생활이라 하면 은밀한 취미 같은 걸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역사에서도 부유층들이 별난 행적을 감추기 위한 그럴싸한 언어를 찾으면서 등장한 단어다. 그래서인지 휴대폰 잠금장치를 수사기관이 강제적으로 해제하는 것은 보장되어야 할 ‘내부’가 공격받는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데 동의하지만, 어떤 사람의 드러난 일상은 이미 ‘외부’로 나온 것이기에 여기저기 유통되어도 괜찮다고 착각한다. 연예인이 길거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게 무려 국민의 알 권리라면서 공개되는 세상이니, 어떤 것들은 사생활인지 아닌지 논쟁조차 되지 못한다. 특히 사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떠올릴 수 있는 거라면 더 여기저기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 사람들은 좋은 의도라면서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당사자가 문제 삼으면, 좋은 게 좋은 건데 왜 그리 까탈스럽냐고 오히려 무안을 준다.
그 버릇,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했다. 방역정보라면서 굳이 몰라도 되는 개인의 정보들이 정교히 나열되었다. 비상시국이기에 다 알아야 되었을까? 확진 판정을 받은 콜센터 직원과 새벽 녹즙 배달원이 동일인이라는 게 왜 중요한 정보일까. 방역은 밀접접촉자를 빨리 찾아내고 격리하고 관련 공간을 (가급적 타인들 모르게) 소독하는 것이지, 이게 누구의 삶이 누구에게 해석될 여지를 줘도 됨을 뜻하진 않는다. 누구인지 모르게 알려지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자신이 모른다고 그가 영원히 익명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건 엄청난 착각이다. 주변 사람이라면 금방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세밀한 내용들이었다. 구로의 000빌딩 11층의 00보험의 위탁 콜센터에서 근무했고 녹즙은 여의도에서 00투자회사 등에 배달했다. 40대이고 여성이다. 그리고 퇴직 일자도 공개되었다. 지역, 건물과 회사명, 하는 일, 그리고 연령과 성별 정도면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소개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누가 어디를 갔는지를 방역당국이 파악하는 것과 그 어디가가 취합된 ‘1인’의 행적이 알려져 다른 이들이 ‘그 아무개가 코로나 걸렸대!’라고 유추하게끔 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 확진자는 ‘코로나가 불평등의 민낯을 드러냈다’면서 여기저기 활용되었다. 놀다가, 여행 다니다가 혹은 어떤 나라의 대통령처럼 마스크조차 거부하다가 확진된 이들처럼 욕을 먹지도 않았다. 착한 동선이라고 대중들에게 판정받아서다. 그러면 괜찮은 걸까?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아는 사람이 늘어나기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무례한 반응들을 팬데믹 시대의 팔자라고 여기면 그만일까?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의도했든 안 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물론 손택은 전쟁이 끔찍한 이미지로 표출될수록 알맹이 빠진 연민만이 부유하게 됨을 분석했지만, 중요한 건 인간이 자극적으로 소비될수록 사회구조적인 변화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고 생각해 본다. ‘대학원생 00번 환자, 신촌역에서 아침마다 수백 명 만나’라는 기사 제목이 떠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공부나 하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니 전체에게 피해를 주네”라면서 이때를 기회 삼아 혐오를 분출시킬 타인을 확인하는 것도 비참했겠지만, 외부의 혐오보다 두려운 건 빌어먹을 내 동선이 그것뿐이라는 처참함이다. 자신만의 내밀한 삶을 공개하기 싫은 것처럼,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도 누군가에는 깊숙이 감추고 싶은 정보다. 측은지심을 자아내게끔 비춰지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동정의 눈빛이 ‘카페에서 치즈케이크 먹는 나를 보고’ 경멸로 바뀔 거라는 걸 잘 알아서다. 일상의 조각이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다면, 누군가에게 그 일상은 이미 사생활이 아니다.
대중들은 개인의 동선을 구체적으로 원했고 공개된 걸 평가했다. 자신의 일상이 어그러진 만큼 적을 찾아 칼을 휘둘러도 된다고 착각한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간 강남 모녀, 온천을 방문했다는 목사 부부 등의 표현들이 별 문제의식 없이 부유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서로가 어떤 관계인지, 직업이 무엇인지가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공개되면 방역수준이 높아지는 걸까? 이 내용들은 특정 지역과 직업에 대한 원래의 고정관념을 덕지덕지 활용해서 혐오를 정당화하는 양념에 불과하다. 00의(지역) 00대를 다니는 00대(연령) 00강사가 00클럽을 방문한 걸 숨겼다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00클럽 앞에 붙은 저 상세한 정보가 아마 감추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는 공부하던 시절, 주말마다 결혼식장 아르바이트까지 했었다. 일당도 괜찮았지만 뷔페 음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효율성 덕택에 꽤나 오랫동안 접시를 날랐다. 이 동선이 공개되면 내 삶엔 영향이 없었을까? 나는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에 몸과 마음을 바치지 못했다. 이유가 명확했기에 들키기가 싫었다. 힘들게 공부를 한다는 건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소재일수도 있겠지만, 어떤 곳에선 별 영양가 없는 개인의 사적 정보일 뿐이다. ‘괜히 물 흐리지 말고 그냥 일이나 하지’라는 험담의 연료가 되는 사생활, 이게 공익의 무게보다 언제나 가벼운 것일까?
사생활은 어디까지 공개되어야 하냐는 논의가 코로나 시대를 강타하고 있지만 공개되어야 할 사생활이란 없다. 개인의 이야기는 개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어떻게든 오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비상시국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비상일수록 제한된 정보만으로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이들은 떠도는 개인정보를 파편적 조각으로 치부하지 않고 어떻게든 퍼즐을 완성하려고 한다. 코로나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대한민국에서 엉성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법은 잘못한 게 없다. 사람들의 조급함이 누군가의 권리를 무시했을 뿐이다.
오찬호 사회학자
오찬호/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비판적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진격의 대학교’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등 한국 사회의 민낯을 고발하는 책을 여러 권 집필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공동체 안전’과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를 충돌시킨다. 본래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할 일상’이라는 뜻을 내포하는데, 소셜미디어 발달과 감염병 사태는 사생활 보호의 마지노선을 위험하게 넘나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 시사평론가와 프랑스 언론인이 쓴 ‘빅데이터 소사이어티’(부키)는 구글·페이스북·애플·아마존 등 빅데이터 기업이 주도하는 디지털 혁명의 그림자를 비춘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초연결 네트워크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에 인간이 어떻게 종속되는지 파헤친다. 저자들은 “디지털 혁명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더 나아가 민주주의에 은밀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사 누스바움과 솔 레브모어가 엮은 ‘불편한 인터넷’(에이콘출판)은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침해의 경계를 숙고한다. 유명 연예인을 죽음으로 내몬 악성 댓글, ‘개똥녀’ ‘된장녀’ 등 숱한 신상털기 행태를 거론하며 “악취 풍기는 인터넷이라는 자유 지대에 ‘법의 지배’라는 소금을 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윤석 기자ㅣ문화일보 2021.01.11
/ 2022.03.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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