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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날 좀 보소' 손짓하는 곳 (2022.03.19)

푸레택 2022. 3. 19. 19:05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날 좀 보소' 손짓하는 곳 (daum.net)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날 좀 보소' 손짓하는 곳

밀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다아랑의 전설 품은 애절한 아리랑 고개 아동산길에서 바라본 밀양강.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빽빽한 볕'이란 이름대로 밀양의 아침은 봄기운이 가득하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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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산길에서 바라본 밀양강.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날 좀 보소' 손짓하는 곳

밀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다
아랑의 전설 품은 애절한 아리랑 고개

 

'빽빽한 볕'이란 이름대로 밀양의 아침은 봄기운이 가득하다.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매화는 금세 부러질 듯 버겁기만 하다. 영남루에 올라 밀양강을 바라본다. 표표한 일엽편주가 아랑의 슬픈 사연 품고 저리 떠 있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 좀 보소’하는 밀양아리랑 가락에 누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고개를 돌려본다.

◆ 영남루에 오르다

밀양향교에 핀 개나리꽃.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밀양강을 끼고 절벽 위에 남향으로 도도한 영남루(嶺南樓)는 본래 신라시대 사찰인 영남사(嶺南寺) 절터에 고려 공민왕이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 부르면서 시작됐다. 이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 1844년 헌종 때 만들어진 누각이 오늘에 이른다. 영남루 앞에 섰다.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창연한 누각이 마음을 숙연히 가라앉혔다. 기둥이 우람하고 마루가 크고 넓어 100여명이 앉아도 넉넉해 보인다. 선인들은 밀양강을 바라보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을 것이리라. 밀양의 영남루는 조선의 3대 누각으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위용이 대단하다. 낙동강 왼쪽의 큰 마을이라는 ‘강좌웅부’(江左雄府), 조령 이남의 제일 이름 높은 누각이라는 ‘교남명루’(嶠南名樓), 밀양강과 읍성이 한폭의 그림과 같다는 ‘강성여화’(江城如畵)란 글귀의 현판이 루(樓)의 명성을 더한다.


◆ 무봉사와 밀양읍성

 

무봉사 오르는 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영남루 맞은편 북향의 천진궁(天眞宮)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밀양읍성(密陽邑城)의 객사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일제 때는 역대 왕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헌병대의 감옥으로 사용했다. 역사의 영과 욕을 같이한 천진궁을 지나쳐 우측으로 돌아드니 봉황이 춤을 춘다는 무봉사(舞鳳寺)다. 무봉사는 보물 제493호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광배와 좌대가 어우러져 원래부터 하나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각자의 탄생이 다르다. 석가여래좌상은 영남사지(嶺南寺址)에 있던 것을 옮겨 모신 것으로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었으며 근처에서 발굴된 광배를 붙이고 대좌를 새롭게 만들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으나 원래가 하나였던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무봉사를 지나 아동산(衙東山)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밀양강과 곁을 해서 지나는 동안 밀양아리랑이 입에 맴돌았다.

 

밀양읍성.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옛날 밀양부사 딸 아랑(阿娘)을 사모한 사내가 침모와 짜고 못된 짓을 하려다 아랑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랑을 죽여 숲속에 묻어버렸다. 이후 밀양의 부녀들이 아랑의 정절을 사모해 ‘아랑, 아랑’ 하고 불러 이것이 오늘날의 민요 아리랑으로 발전해 밀양아리랑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산은 높거나 크지 않았으나 읍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적을 방비하기 위한 가파른 산을 잡아 성을 쌓았기에 외성으로 도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편한 길이었으나 읍성 동문으로 올라 갈 때는 숨이 차올라 헉헉거린다.

 

◆ 밀양향교와 밀성 손씨 고택

 

밀양향교 풍화루.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성을 출발해 규모가 커서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더불어 영남의 3대 향교라 불리는 밀양향교(密陽鄕校)가 있는 교동(校洞)으로 들어섰다. 옥교산 중턱에 자리한 밀양향교는 한옥 고택들 뒤편에 있어 향교로 들어서는 골목길의 운치가 그만이다. 이곳은 밀성 손씨 교동파(校洞派) 종택이 모여 있는 곳으로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어 겉만 보다가 다행히 손병준 고가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담장은 옛 흙담의 형태를 간직했고 다른 곳처럼 아직 손이 타지 않아 자연스럽고 좋았다. 밀양향교에 정문인 풍화루(風化樓)에 도착했다. 풍화는 풍속교화(風俗敎化)의 준말로 인륜과 성현의 뜻을 밝혀 풍속을 교화하고 돈독하게 하는 공간이란 뜻이지만 봄기운 만연하고 꽃이 만발하니 봄바람 소소히 들어 이때쯤이면 공부는 저만치 놔두고 풍류를 즐겼을 법하다.

손병준 고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풍화루를 지나 명륜당에 들어서니 학생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늘은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고 푸르다. 동재와 서재를 둘러보고 명륜당을 지나 대성전 뜰에 들어서니 꽃들의 천지다. 개나리는 노랗게 주변을 물들였고 매화는 가시에 가득했으며 큰개불알풀꽃이 지천이다. 봄의 소리가 와글와글하다. 동백은 바닥에 가득히 붉음을 토하고는 처연하게 서있다. 이제 매화도, 동백도, 개나리도 내년을 기약할 태세다. 한동안 자리를 못 뜨고 구경하다가 시간이 많이 흘렀다.


◆ 조선의 정원 월연정

월연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추화산 봉수대를 지나쳐 산을 넘었다. 일순 하늘이 흐려지고 날이 추워진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탓하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추화산은 가득한 소나무 사이로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제선충으로 중간중간 이가 빠진 듯 베어나간 소나무는 검은 그물망 피복에 덮여 안타까웠다. 소나무 수향(樹香)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월연정(月淵亭)이다. 월연정은 월연대(月淵臺)와 살림집인 제헌(霽軒), 쌍경당(雙鏡堂)을 합해서 부른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강물 위에 비춰 떠있는 달이 아름다워 쌍경당이고 월연정일까. 담양의 소쇄원 못지않게 조선 정원의 청아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조선 중종 때 월연(月淵) 이태(李迨)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호를 따서 월연정을 지었다. 월연정을 지나 월연터널이 보인다. 경부선 철도로 사용되다가 1940년 복선화되면서 일반 도로로 이용되는 터널이다. 멀리 강 건너 마지막 목적지 금시당이다.


◆ 금시당, 백곡재 매화가 봄을 알리다

금시당과 벽곡재.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금시당(今是堂)과 백곡재(栢谷齋)는 두채의 건물이다.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 좌승지를 지낸 이광진 선생의 별서다. 뒤로는 산성산 일자봉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밀양강이 휘감아 도는 용트림 하듯이 굽이치는 용호(龍湖)를 이뤄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임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다시 백곡 이지운에 의해서 재건됐다. 백곡재는 철종 때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밀양의 봄소식은 금시당 매화나무에서 찾아야 한다. 450년 선비의 뜰인 금시당에서 200년 동안 매화는 향을 내려 봄소식을 알려왔다. 아직도 여전히 매화나무에는 봄이 가득했다. 곧 꽃잎에 봄을 싣고 산산이 비산해 봄의 절정을 알릴 것이다. 올 가을 450년 된 은행나무가 황금빛 단장을 할 때 다시 밀양을 찾아야겠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밀양아리랑)

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ㅣ머니S 2019.04.04

/ 2022.03.19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