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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포스트휴먼 감각하기 (2022.03.17)

푸레택 2022. 3. 17. 12:32

포스트휴먼 감각하기 (daum.net)

 

포스트휴먼 감각하기

Q. 포스트휴먼은 현 인류와 외형적 차이가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신체를 상상해보자. 돈선필 휴대용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신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거북목인데, 현재에는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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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감각하기

기술적 특이점이 오는 해, 2045년.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초월할 것이라고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주장한다. 인간이 좇기 어려운 속도로 기술이 발전한다는 예측이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온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인간의 의미도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 즉 포스트휴먼의 등장도 기대해봄직하다. 허나,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지 않은 현시점에 포스트휴먼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상상은 해볼 수 있겠다. 다섯 명의 미술가에게 포스트휴먼에 관한 공통 질문을 던지자, 이내 흥미로운 답변들이 돌아왔다

Q. 포스트휴먼은 현 인류와 외형적 차이가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신체를 상상해 보자.

돈선필 휴대용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신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거북목인데, 현재에는 각종 질환을 야기하는 좋지 않은 변형 골격으로 이야기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거북목을 인체의 표준 규격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황문정 포스트휴먼은 비인간뿐 아니라 인간을 해석하는 또 다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꼭 신체적 변화가 있지 않더라도, 다른 종과의 관계를 확장하여 생각했을 때 신체적으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인간 몸속에 수천, 수만 개의 미생물이 함께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찬 오히려 포스트휴먼은 기계와 더 극단적으로 분리된 모습으로 정의될 것이다. 인류는 현재에 ‘접속’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변형되지 않은 신체가 훨씬 가치 있을 것이다.

윤제원 1990년대~2000년 초에 생명공학적 묵시록이 유행했다.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도 그 맥락 중 하나일 거다. 실제 그즈음 복제 양 돌리가 출현했고 인간의 유전자를 완전히 해독하고자 하는 게놈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니, 시대적으로 생명공학이 미래의 열쇠처럼 보였다. 비슷한 시기, 초등학생이던 나는 ‘과학상상그리기대회’에 온몸이 녹색인 사람을 그려 출품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인기 있던 미드 시리즈인 《브이 V》의 파충류 외계인과 모습이 흡사하여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한 기억이 있다.

사실 그 녹색 인간은 파충류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의 피부에 엽록소를 이식하여 외부 활동만으로도 광합성이 되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전자 변형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저것이든 그것이든 당시 시대상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휴먼의 신체적 상상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는 IT 기술의 발전으로 AI나 기계 등이 미래적 상상의 대세인 듯 보인다. 그 총아
는 아마도 아이언맨(+자비스)일 것이다. 무엇이 됐든 휴먼은 포스트휴먼에 대해 현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더 편리하고 강하고 멋진 것을 상상하지 않을까. 물론 반대로 디스토피아적으로 기괴하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 유토피아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헤테로토피아일 것이기에, 독자들의 멋진 상상과 우울한 상상 그사이 어디쯤일 것 같다.


오천석 영국의 윌리엄 하이암 박사가 선보인 ‘미래의 직장 동료’ 엠마는 어깨가 굽고 눈이 충혈됐으며 다리가 부은 중년 여성처럼 보인다. 윌리엄 박사는 지금의 사무직 노동 환경이 20년간 그대로 유지될 경우, 엠마가 당신의 옆 파티션에 앉을 거라고 조롱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그는 왜 자신이 엠마처럼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실존 인물인 본인의 노년을 구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진 않았을는지.

머릿속 질문이 쇄도하는 가운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엠마처럼 악의적인 형상은 아닐지라도, 우리 휴먼의 외형은 변화한다. 시나브로 달라질 우리의 외모가 ‘포스트-’라는 접두어 때문인지, 그저 휴먼됨 때문인지, ‘포스트-’가 지시하는 현재 너머의 분절적 사건 때문인지 정확히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것 같다: 포스트휴먼은 휴먼과 무엇이 다를까? 포스트휴먼 담론의 주된 논자로 보이는 닉 보스트롬 교수는 포스트휴먼을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기에 현재 기준으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라 칭하며, 건강 수명, 인지, 감정 같은 ‘포스트휴먼 능력’ 중 최소 1개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최초의 질문인 ‘포스트휴먼의 신체적 특징’으로 넘어오자.

닉 보스트롬이 옳다 친다면, 포스트휴먼은 우리 휴먼의 수명을 훌쩍 넘길 정도로 건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이 인간됨의 레거시를 어느 정도 비율로 가져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신체를 유지하되 외부의 보철로 기능을 연장할까, 또는 육신을 갈음할 새로운 성배를 찾아나설까? 전자라면 혈색, 윤기 등 건강한 휴먼의 표징을 그대로 가져갈 듯하다. 후자도 안 그럴 이유가 없다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마치 영생을 얻고 말라비틀어진 그리스신화 속 매미 티토노스처럼. 그가 젊음을 깜빡했다고 했지, 건강하지 않다고 한 적은 없지 않은가?

Q. 포스트휴먼은 인종, 성별, 종교 등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담론에서 자유로울까?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은 인류 문명의 업보인 인류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돈선필 우리는 팬데믹과 각종 기후변화 및 공급망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이 세계인구 감소세에 접어들고 현재보다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때문에 지금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소한 능력이 좀 더 소중해질지도 모르겠다.

황문정 인간 중심의 담론에서 자유롭진 않을 것 같다. 비인간들을 인지하고 관계에 포함시키려는 인간의 관점에서 출발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찬 포스트휴먼은 더 철학적인, 현재에 대한 존재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휴머니즘 담론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윤제원 가솔린보다 전기가 친환경이라며 전기자동차를 권장한다. 그 전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포스트휴먼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특이점 이후의 무엇이라고 한다면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라면 현상만 다를 뿐 다양한 담론에서 부자유스러울 것이다. 당연히 인류세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해당 시대 (포스트) 인류세랄까. 무엇이 됐든 현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발현되리라 본다, 한 예로 비트코인 채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전력 투입과 그래픽카드 가격 폭등이 수반된다. 다만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담론에선 자유로워질 수 있을 여지가 있다. 그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수립되는지에 따라….

오천석 
두 명의 포스트휴먼을 상상해본다. 한 명은 인간됨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이 가까워질 때까지 속도를 높인다. 다른 한 명은 새로 얻은 능력을 눈앞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쓰고 싶어 하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전제는 인류세 또한 휴머니즘의 현재이자 결과라는 것. 전자는 인간을 냉동해 엔트로피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 맥스 무어나 상하이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은 닉 랜드, 명예 화성인 일론 머스크 등 소위 ‘엑스트로피언’이겠다. 이들은 인간의 영토가 흐릿해 보일 때까지 최대한 빠르게 직진해 새로운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 목표다. 그곳에 도착하면 자유, 정의, 박애 등 인간적 잔여물이 무용해질 것이라 믿으며. 후자는 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포스트휴먼은 휴먼 2.0인 셈이다. 이들에게 초월은 위험한 단어로, 혁신은 어디까지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대안이 아닌 기존의 구조를 재배치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필요한 것은 호환성 업데이트다. 우리의 몸과 사회적인 것, 생태계는 여전히 포스트휴먼이 살아갈 인프라를 구성할 것이기에, 이들은 이 세계가 아닌 지금-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일 것이다.

Q. 포스트휴먼의 생활을 상상해보자. 포스트휴먼도 밥벌이에 연연할까? 우리처럼 ‘자소서’를 쓰겠냔 말이다.

돈선필 사람이 물리적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는 몇몇 생활의 디테일이 변할지언정 삶의 모습은 크게 변함이 없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흔적을 보면 인터넷만 없을 뿐이지 동시대의 삶과 큰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황문정 이 같은 입장은 포스트휴먼을 인간의 생활에 대입시켜 생각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생각인 것 같다.

이찬 포스트휴먼은 존재를 직접 만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오히려 만날 기회가 드물기에 그것을 훨씬 기대할 것이다.

윤제원 재미있는 사실은, 유년기에 시청하던 미래에 대한 공상과학만화 등에 등장하던 과학기술을, 상당 부분 현재 내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화상으로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우주 식민지에서 생활하는 것은 요원하지만. 집집마다 비행기가 있는 삶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다, 현대자동차의 미래 주력사업 중 하나가 에어택시인 정도니. 미래의 우리는 무엇을 입고, 먹고, 자고, 이동할까?

그런데 조금 문제점이 있다. 질문지에 있듯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닌 포스트휴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휴먼’과 포스트휴먼은 다르다. 물론 포스트휴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정의는 가변적일 수 있겠다만, 일단 기능적으로 완전히 다른 포스트휴먼을 상정한다면 지금 모습과 아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슷하다면 에어택시를 타고 맛집을 탐방하고 있을지도…. 아니면 드론으로 배달받거나. 여하튼 포스트휴먼이 지금 우리와 기능적으로 다르다는 가정 아래 앞서 언급한 ‘엽록소 휴먼’을 생각해보자.

피부에 엽록소를 이식한 인간은 식사가 필요치 않다.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 그들의 식사 시간은 햇살을 흡수하는 산책이 될 것이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도심의 빌딩 숲에서는 현재의 태닝 숍 같은 시설이 식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이 디바이스로 옮겨갈 수 있다면 순간이동도 가능하리라 본다. 온라인에선 이동이 완전히 자유롭고 오프라인에서조차 가고자 하는 장소의 임시 신체에 정신만 링크시키면 되니까 말이다. 해당 상상은 포스트휴먼의 정의가 생명공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ICT(정보통신기술) 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상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 공통점은 생존자들이 노동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이 됐든 기계공학이 됐든 현 인류의 모든 노동을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반복적이고 비의도적인 노동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모든 타의적 노동은 기술에 맡기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 발전적인 선택적 노동만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플레이어이고 그들은 NPC다. 플레이어와 NPC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소서에 대한 부분은 다음 질문으로 넘기겠다.

오천석 풍속은 구름처럼 만 갈래 가능성으로 뻗어 나간다. 당대의 유행과 습관을 예측하기도 버거우니,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겠다.

1) 신체를 폐기하고 가상성의 충동에 굴복할 경우. 입고, 먹고, 자는 사사로운 생활양식에서 점차 벗어난다. 일상은 번거로운 신체에 동력을 공급하고 가동하는 절차니까. 포스트휴먼은 그 시간에 할 일이 많다.

2) 신체를 유지하며 지능 기계와 결합할 경우. 입고, 먹고, 자고, 이동하고, 일하는 일상이 이어진다. 일상은 결국 우리 몸에 밥을 먹이고 움직이는 과정이니까. 우리가 바로 포스트휴먼이다.

Q. 포스트휴먼을 심미적 관점에서 본다면? 미의 기준은 현 인류와 다를까?

돈선필 인류사에서 미와 추에 대한 기준이 극적으로 반전하는 시기는 없었다. 유행처럼 특정 주기를 반복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돌고 돌 뿐이다.

황문정 결국 이것도 인간의 눈으로 포스트휴먼을 해석하는 것 아닌가. 인간인 내가 다른 종의 가치관 등을 판단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윤제원 최근 노란색과 검은색의 색채대비로 디자인한 카페를 방문했다.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대비로 공간이 모던해 보였다. 색채학을 공부할 때 노란색과 검은색은 큰 채도 차이로 인해 경고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배웠다. 실례로 사건 현장의 폴리스라인과 공사장의 경고 표시 그리고 군부대 바리케이드 등 모두 노란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왜 예뻐 보일까? 아마도 알고는 있지만(익숙하지만) 카페라는 공간에서 보지 못하던 컬러인 것에 기인하며 최근 워너비로 자리 잡고 있는 미니멀 디자인의 영향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현재 미적 기준의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에피스테메’에 의한 학습된 결과물이다.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보이는 미적 기준은 핫하거나 촌스럽다. 우리가 세련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에피스테메의 일각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포스트휴먼으로 갈 것 없이, 아름다움의 기준은 가변한다. 다시 돌아가서, 언케니벨리에서 보듯 현재 휴머노이드의 디자인은 그 골짜기를 회피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휴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모습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과 다른 포스트휴먼에게 그 골짜기가 회피할 요소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초기 단계의 포스트휴먼은 휴먼의 아름다움의 기준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휴먼은 휴먼의 기준과 별개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이란 희소성의 원칙에 따른다고 본다. 철기시대 이전에는 금보다 철이 귀하니 철이 더 귀금속인 시대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 희소한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 테니, 새로운 해당 시대 인류세와 더불어 그들의 시대에 희소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 자명하다.

오천석 닉 보스트롬의 논지를 빌려오겠다. 그는 인류사의 그 어떤 이들보다 뛰어난 포스트휴먼이 나타난다면, 역사적으로 뛰어난 성취물의 가치가 퇴색해 보이지 않겠느냐는 가상의 우려를 일축한다. 더 복잡하거나 섬세한 미감을 가진다 한들 단순함의 미덕을 모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클래식 애호가도 새 소리를 사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기존 창작물이 가치를 잃게 되더라도, 새로이 계발한 미감을 바탕으로 전례없는 성과를 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Q. 경험과 생각을 데이터화해 서버에 저장하고, 신경계를 기계화하는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관계 맺기와 발언은 어떤 형태일까?

돈선필 오늘날 SNS의 흐름과 유사할 것이다. 가볍고 빠르고 스킨이 중요하고 각 계정주들의 극적 흥망성쇄를 구경하며 각자의 소신 발언이 화이트노이즈가 되는 형태.

황문정 신체적 대체는 이루어질 수 있어도, 인간의 본질은 포스트휴먼 시대라는 정의 아래에서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상 세계 등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이 생겨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만들어온 관계 맺기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윤제원 
앞서, 우리는 플레이어고 그들은 NPC라고 언급했다. MMORPG를 해보았는지? 손에서 화염구를 내뿜고 용을 타고 날아다닌다고 해서 인간의 행동 패턴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더 강화된다. 2000 년대 초기 MMORPG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접속만 끊으면 안 볼 사이기에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는 유저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게임 접속 종료를 해도 디스코드, 인스타, 카카오톡 등 다양한 온라인 연결망이 그들을 엮고 있다. 따라서 온라인 생활이 현실과 다름 없는 생활에선 자기 검열과 통제가 더욱 심화될 심산이 크다고 본다. 지금 게임에선 크게 PVP와 PVE로 나뉘어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느냐 죽이지 못하느냐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AI는 죽일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신기한 부분은 현실에서 살인은 가장 큰 죄일 텐데 게임에서 살인(살해)은 너무나 기본적은 콘텐츠다. 명작이나 고전이라 칭송받는 많은 게임 역시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해당 세계 속의 NPC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미래에 그 NPC들이 우리들과 동일한 인지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까? 현재 강화되고 있는 플레이어 간 연결망에 더해 NPC들과의 연결망 역시 강화된다면? 결국은 상상을 기반으로 행동이 자유로워지는 세계는 더욱 강한 법률과 재제가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상상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 외도는 현재 육체의 한계를 기반으로 하는 외도보다 더욱 파괴력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의 관계 맺기와 발언은 지금과 비교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게임에서 밴(Ban)은 접속 종료이지만 삶의 밴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오천석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경험과 생각을 데이터화하고, 신경계를 기계화하는 건 바로 스마트 디바이스에 동기화된 우리의 모습이다. 070 Shake의 <Modus Vivendi> 커버처럼 몸뚱이가 금속성 물질에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구름 위로 행동 데이터를 쏘아 올려 빅 테크를 위해 보이지 않는 석유를 축적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누구의 소유가 될까?

작년부터 시작된 웹 3.0 하이프는 유저의 데이터 주권을 둘러싼 영토 싸움처럼 보인다. 웹 3.0의 옹호자는 불투명하게 분배되고 있는 데이터 통제권을 유저가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앙 조직 없이 토큰을 지닌 구성원의 투표로 작동하는 블록체인 커뮤니티, DAO가 그 모델이다. 언젠가 DAO 의 방식이 주류화되어 ‘FAANG(지금은 MANGA)’ 의 정보 헤게모니가 성공적으로 해체된다면, 우리는 잠시나마 29.1억 명(2021년 4분기 기준 페이스북 월간 활성 유저 수)이 29.1억 명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의견의 반향실에서 탈출할 것이다. 곧이어 타인과 마주하거나 분노할 필요 없는 폐쇄된 성채 또는 토큰의 보유량에 따라 발언권이 정해지는 금권 정치의 탑으로 재입장할 테지만.


Q. 포스트휴먼은 신을 믿을까?

돈선필 형태가 바뀔지언정 신은 언제나 존재한다. 인류는 언제나 ‘아이돌’이 필요하다.

황문정 포스트휴먼이라고 해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찬 믿을 것이다. 신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복제, 무한한 세계에서 유일함은 최고 가치가 될 것이다.

윤제원 많은 사람이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본다. 사주를 믿는 사람이 많다. 바다 건너서도 혈액형이니 별자리니 등등 어떠한 패턴을 카테고리로 묶으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경향인가 믿음인가? 경향은 일종의 데이터 취합일 것이고 믿음은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발생한다. 최근에는 MBTI가 많이 들린다. 정신분석학자가 여러 자료를 통해 고안해낸 이것은, 또 많은 사람이 믿는다. 당신은 MBTI를 믿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믿음이란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증거를 평가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엄청난 구실, 엄청난 변명 거리다. 믿음이란 증거가 없는데도, 아니 어쩌면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믿음은 논증을 통해 스스로 정당화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사주든 MBTI든 믿는 사람은 많지만, ‘논증을 통해 스스로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치자.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지만 그것은 경험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논증의 궤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시대에, 지구 생명체의 모든 빅데이터가 축적되고 분석 가능하다면 어떨까? 완전한 빅데이터는 과거를 축적하고 현재를 취합해 미래조차 예상이 가능할 게 자명하다. 사주가 소수의 데이터였고 MBTI는 다수의 데이터고 빅데이터가 완전한 데이터라면, 빅데이터에 대한 논증적 반박은 불가능하다. 앞서 나온 질문에서 ‘경험과 생각을 데이터화해 서버에 저장하고, 신경계를 기계화하는 포스트휴먼의 시대’라는 언급이 있다. 바이블에 따르면, 신은 그 모습을 본 따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 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맥락으로 이야기하자면, 데이터화한 포스트휴먼이 그 모습을 본떠 신을 만든다면 그 모습은 데이터일 것이 자명하다. 그 데이터를 모두 총괄하고 분석하여, 보살피고 제시하고 규율하는 ‘말씀’을 주는 존재인 빅데이터,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초월자의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일 것이다.

P.S. 빅데이터가 모두 분석하고 보살피고 제시하고 규율하는데, 자소서가 필요할까?


오천석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은 어느 사회에나 편재해 있는 듯하다. 어떤 돌파를 이뤄낸 포스트휴먼의 사회라면, 삶의 소실점을 향한 신념이 더더욱 강하지 않을까?

Editor : 조진혁 | llustration : 게티이미지뱅크 l 서울문화사 2022.03.08


/ 2022.03.1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