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해풍 넘실대는 큰 고개, 대관령 (2022.03.15)

푸레택 2022. 3. 15. 13:19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해풍 넘실대는 큰 고개, 대관령 (daum.net)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해풍 넘실대는 큰 고개, 대관령

가장 먼저 눈 내리고 맨 나중에 녹는 차항리 옛길 줄지어선 풍력발전기.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동해 바다를 건너 강릉을 지나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바다에서 육지로 거센 바람이 넘실

news.v.daum.net

줄지어선 풍력발전기.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해풍 넘실대는 큰 고개, 대관령

가장 먼저 눈 내리고 맨 나중에 녹는 차항리 옛길

동해 바다를 건너 강릉을 지나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바다에서 육지로 거센 바람이 넘실댄다. 명징한 하늘은 새하얀 솜털을 뿌리면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산은 넓은 목초지가 됐다. 목초지 마른 풀은 바람의 길을 따라 이리저리 누웠다 일어나며 요란하게 휘날렸다. 길섶 억새는 거센 바람에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도 부러지지 않았다 대관령은 백두대간을 질러 횡계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다. 이 고개는 영남과 영동, 영서를 가르는 기점이 되기도 한다. 

길섶에 말라붙은 야생화.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예전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였던 고형산(高荊山)이 비좁고 험한 길을 넓게 닦아서 수레를 이용해 강릉에서 한양 가는 길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조 때 고형산의 묘가 파헤쳐져 부관참시당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병자호란 당시 도로를 넓혀 한양이 빨리 무너졌다는 이유에서다. 대관령은 1970년대 목장으로 개발되기 이전까지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산이 험하고 깊어 잡목과 원시림이 우거진 척박한 곳이었다. 삼양의 목장 개발로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지 벌써 50년이 됐다.

◆ 눈꽃마을 별칭 붙은 차항리

차항리 눈꽃마을 능선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대관령의 서쪽의 차항리는 눈이 가장 먼저 내리고 맨 나중에 녹는 곳이다. 이번에 걸을 곳이 바로 이곳 차항리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가장 추운 곳을 걷게 됐다. 길은 ‘황병산 사냥민속놀이 보존회’에서부터 시작했다. 시도무형문화재 19호로 지정된 황병산 사냥민속놀이는 1m 이상 눈이 쌓여야만 즐길 수 있는 겨울철 놀이기에 이곳 차항리의 이름에 눈꽃마을이란 설명이 붙는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에 눈만 빼꼼히 내놓고 완전무장을 했다. 동행이 옆에서 꼭 곰같다고 놀려대며 웃는다. 너무 껴입어서 몸의 움직임조차 자유롭지 않아 공감이 갔다.

◆ 매서운 바람에 곧추선 역고드름


땅을 헤집고 나온 역고드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눈꽃마을 사람들이 돌로 쌓은 소원탑을 뒤로하고 잠시 오르다보니 영화세트장이 나왔다. 처음엔 군부대인줄 알았는데 <마지막 위안부> 촬영 세트장임을 알았다. 삼십여 분을 오르니 능선 길이다. 된바람이 맹렬히 몸을 훑는다. 이토록 차고 거센 바람은 참 오랜만이다. 겹겹이 입은 옷 틈으로 밀려들어오는 냉기에 다시 옷깃을 여몄다. 너무 추워 날카로운 바늘쌈으로 찌르는듯한 통증도 느꼈지만 이내 무감각해졌다.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춥다고 느끼기에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흰 풍력발전기가 이어지는 너른 언덕이, 바람에 고개를 숙이는 마른 풀이 아름다웠다. 산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수십기가 넘는 풍차가 도는 풍경은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장관을 연출했다. 대관령의 매서운 추위는 성난 것처럼 뾰족이 곧추선 역고드름을 만들었다. 능선 길 내내 발에 밟히며, 우두둑 산산이 부서졌다.

◆ 사파리목장 전망대

사파리목장 전망대 가는 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사파리목장 전망대에 도착했다. 동해 먼 바다에서 파도를 훑고 온 바람이 대관령을 넘으며 더 세게 불어 길을 방해하지만 즐겁고 청량하기까지 하다. 문득 맵찬 바람에서 바닷내를 맡는다. “야! 이렇게 추운데도 전혀 춥지가 않아. 기막힌 날씨야. 멀리 조그마한 풀도 결이 보이잖아.” 같이 길을 나선 동행은 연신 감탄한다. 시퍼렇게 깊은 하늘과 하얀 솜털구름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더 투명한 그림을 만든다. 풍광이 아름다워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다 그림이 되는 보기 드문 날이다. 

해발 1100m 지점의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황병산을 보며 걷다

사파리목장을 지나는데 경고문구가 긴장하게 만든다. 구제역 때문에 목장 출입을 금한다는 문구다. 일년 전에도 붙어있던 것다. 지금은 괜찮을 텐데도 저리 붙여놓은 것은 사람들 출입이 귀찮은 탓일 테다. 

해발 1100m 지점에서 바라본 풍광.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목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목장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파리목장이 고도가 해발 950m니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풍차를 보기 위해서는 150m를 더 올라가야 한다. 가파르지는 않으나 오르막이라 조금 힘들다. 길을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황병산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청명한 날씨라 아주 가깝게 눈앞에 와있다. 1100m 고도에 있는 풍차를 기점으로 돌아오면 황병산을 등 뒤로 두고 걷게 된다. 아침부터 시원찮던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찬바람은 매정하게 등을 떠밀었다. 잠시라도 쉬면 땀이 식어 여지없이 길을 재촉한다.

◆ 추워도 행복한 길

명징한 겨울 하늘 배경의 풍력발전기.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풍력발전기 풍차는 ‘쉬잉- 쉬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풍차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거대한 날개가 내 위로 내려오는 현기증을 느껴 눈을 감는다. 괜히 가슴도 서늘해진다. 바람은 절정을 이루며 사정없이 나를 휘갈겼다. 두겹으로 껴입어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감쌌는데도 얼굴이 시리고 손도 감각이 무뎌진다. 정말 춥다. 그러나 행복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현실은 몸이 꽁꽁 어는 강추위라 움직여야 한다. 체감온도는 영하 25도쯤으로 느껴진다. 올 들어 처음 맞이하는 강추위다. 해는 짧아져 오후 다섯시가 되면 어둠이 내려올 것이다. 서둘러도 다섯시에 임박해서 하산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내려서기 시작했다.

황병산.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대관령은 예로부터 바람이 많고 기온도 낮다. 그래서 한겨울 황태를 말리는 덕장이 유명하다. 시래기 또한 유명하다. 다 바람 때문이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한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이 떠오른다. 강추위에다 바람까지 요란하게 불었으니 마땅히 오르지 말고 편안히 집안에서 쉬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럴 때 걷는 것 또한 멋진 일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글=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ㅣ머니S 2018.12.20


/ 2022.03.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