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쓸쓸함 감춘 옛 포구의 초겨울 (2022.03.15)

푸레택 2022. 3. 15. 16:06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쓸쓸함 감춘 옛 포구의 초겨울 (daum.net)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쓸쓸함 감춘 옛 포구의 초겨울

수인선 협궤열차의 추억 딛고 광활한 습지 갈대밭으로수인선 옛 협궤열차 사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소래는 추억이다. 오래전 을씨년한 겨울바람의 거친 결을 비집고 찾아들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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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옛 협궤열차 사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쓸쓸함 감춘 옛 포구의 초겨울

수인선 협궤열차의 추억 딛고 광활한 습지 갈대밭으로

소래는 추억이다. 오래전 을씨년한 겨울바람의 거친 결을 비집고 찾아들면 시커먼 물고랑 따라 들어온 어선에서 꽃게 그물 내리고 순박한 상인들이 갯것을 썰어 상에 올렸다. 이제 소래는 번듯한 빌딩 사이 골목골목 바가지 상혼으로 찌들었다. 그래도 추억의 두레박을 길어올리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였던 옛 정취가 스멀스멀 장딴지를 타고 오른다. 이름만으로 짧은 겨울 햇살의 따사로움을 전하는 소래. 그곳을 다시 찾는다.

뼈대만 남은 소래 소금창고.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염부(鹽夫)는 연신 가래질로 소금을 밀어 올렸다. 제 때 소금 물량을 맞춰야 하니 땀을 식힐 새도 없이 등골이 휘도록 가래를 밀어야 했다. 이렇게 생산한 소금은 과거 소래를 전국 제일의 소금 생산지로 만들었다. 소금을 싣고 인천과 수원을 오가던 협궤열차는 20여년 전 서민들과 연인들의 추억도 함께 싣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다시 소래가 습지로 살아나고 있다. 생명을 품은 생태지로 살아나고 있는 소래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 장수천(長壽川)에 들어서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장수천.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인천대공원을 지나 장수천에 들어섰다. 장수천은 대공원 내에 있는 거마산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흘러 소래포구에서 바다와 만난다. 예전엔 장수천과 만수천이 합류하는 수산동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나 지금은 갯가의 흔적이 없다. 개발로 인해 소래포구 앞 수인선 외곽까지 바다가 밀려간 탓이리라. 남동체육관을 지나서야 풍경은 비로소 갯가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 소래습지생태공원과 소금창고

갈대밭 탐방로.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만수물재생센터를 지나 소래습지에 들어서자 350만㎡의 광활한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곳에 펼쳐진 소래습지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한다. 소래 갯벌은 8000년을 이어오다 개발로 인해 수로가 좁아져 바닷물이 잘 들어오지 못하면서 생태계가 사라져갔다. 갯지렁이가 살 수 없으니 갯벌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습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소래습지의 풍차.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갈대숲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키를 넘는 무성한 갈대숲을 따라 걷다보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이따금 만나는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갈대숲 사이로 녹슨 지붕이 군데군데 보인다. 살펴보니 옛 소금창고다. 예전 전국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는 염전의 모습은 갈대밭에 가려져 앙상하게 녹슨 뼈대만 남은 소금창고 뿐이다. 시간은 이렇게 옛 모습을 사라지게 한다. 생로병사의 인간 모습과 닮아 한참을 자리에 머물렀다.

◆ 담수·기수·염수의 세 얼굴

기수습지의 왜가리.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소래습지는 담수습지와 기수습지, 염수습지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길은 잘 나있어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습지는 담수습지다. 원래는 갯벌이었는데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염분이 빠지고 민물이 고였다. 지나다 탐조대가 있어 살펴봤으나 새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철이 안 된 모양이다. 탐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수습지 지역으로 들어섰다.

염수습지의 철새.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기수습지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다. 왜가리 한 마리가 외로이 물위에 서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멀리 청둥오리 몇마리가 한가롭게 유영한다. 내 눈은 왜가리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봤다. 움직임을 기대하며 바라보았지만 도대체 움쩍도 않는다. 독특한 녀석이다. 포기하고 길을 재촉했다. 갈대는 저마다 키를 자랑하듯 하늘로 목을 내었다. 염수습지로 향했다. 성질이 다른 습지들끼리 서로 붙어있다. 염수습지는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은 폐염전 지역으로 소래포구에 가장 가까이 있다. 이곳에서는 갈대보다는 칠면초, 갯개미취 등이 분포해 소래습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 옛 자취 쓸쓸한 염전지대 

소래습지 생태전시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염수습지를 지나니 염전이다. 바둑판 모양의 염전과 바닷물을 퍼 올리는 수차가 구비돼있어 직접 가래질을 해볼 수 있다 한다. 지금은 바닷물을 끌어들이지 않고 지하 300m에서 물을 끌어들여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것으로 이곳이 염전지대였음을 알려준다. 염전 바로 뒤는 소래습지생태공원전시관이다.

◆ 소래포구와 협궤열차

 

소래역 전시관의 협궤열차.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길의 종착지 소래포구로 향했다. 이곳에서 약 1.5㎞이니 바로 지척이다. 원래 소래포구는 시흥 쪽으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닿고 떠나는 작은 나루터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소래염전은 10년이 지난 1932년 전국 생산량의 50%를 차지하게 됐다. 일제는 소금을 수탈해가기 위해 수원과 인천 사이에 협궤철도(수인선)를 부설했고 1937년에 소래역에서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60여년을 운행하다 1995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삶의 현장 소래포구


소래어시장.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소래역이 있던 소래역사관에 이르는 동안 주말 나들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북적대니 염전이 있던 때의 영화를 다시 찾은 것 같다. 소래역사관에서 월곶으로 건너는 철교로 갔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사라졌지만 소래포구의 철길은 걸어서 바닷길을 건너는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철교 바로 아래 어시장은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어서 와보라는 상인의 언변에 이끌려 줄지어가는 사람들 너머 온갖 해산물이 지천이다.

늙은 갈대의 독백 / 백석


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하야 잠이 든다
물닭도 쉬이 어느 낯설은 논드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섧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달이면
갈거이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른 잎새에 올라 앉는 이때가 나는 좋다

어느 처녀가 내 잎을 따 갈부던을 결었노
어느 동자가 내 잎닢 따 갈나발을 불었노
어느 기러기 내 순한 대를 입에다 물고 갔노
아, 어느 태공망이 내 젊음을 낚아 갔노

이 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 자국
별 많은 어느 밤 강을 날여간 강다릿배의 갈대 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두 내 사랑이었다

해오라비 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다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골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글=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ㅣ머니S 2019.01.03

/ 2022.03.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