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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가을은 선운사에서 붉게 타오르다 (2022.03.15)

푸레택 2022. 3. 15. 13:12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가을은 선운사에서 붉게 타오르다 (daum.net)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가을은 선운사에서 붉게 타오르다

내 마음 훔쳐간 ‘인생 소풍길’ 속절없이 낙하한 단풍으로 발걸음 휘어잡는 절길수리봉에 바라본 선운사와 선운사를 감싸안은 산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선운사(禪雲寺)는 내 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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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봉에 바라본 선운사와 선운사를 감싸안은 산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가을은 선운사에서 붉게 타오르다

내 마음 훔쳐간 ‘인생 소풍길’

속절없이 낙하한 단풍으로 발걸음 휘어잡는 절길

선운사(禪雲寺)는 내 어릴 적 소풍길이었다. 어린 시절 국민(초등)학교 때다. 아침부터 서둘렀다. 조잘조잘 까까머리 국민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걸어 선운사로 소풍을 갔다. 힘들게 고습제를 넘어 도솔암을 지나던 소풍길, 선운사는 내게 그런 곳이다. 이제는 수시로 찾는 곳이지만 언제나 새롭다. 후두둑 져서 산산한 동백이 가득할 때 미당선생의 ‘선운사 동구’를 읊고, 여름 끝자락에 찾으면 서로를 그리워하다 끝내 붉게 꽃으로 핀 상사화(꽃무릇) 천지다. 그러다 이렇게 늦가을이면 형형색색 단풍이 마지막 가을을 붙잡고 있어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선운사는 진흥왕이 왕위를 내려놓고 설립했다고도 하고 577년 백제 위덕왕 때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전설에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용을 몰아내고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다. 선운산은 선운사와 네개의 암자인 석상암과 참당암, 도솔암, 동운암 등이 있다. 예전에는 89암자가 있었다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 아담하고 고아한 석상암

선운사 입구에서 우측 담장을 따라 석상암을 향했다. 가을 햇살은 길섶 나무 위 단풍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지난밤 내린 비에 속절없이 떨어져버린 낙엽이 길에 가득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속삭이듯 다정하다. 석상암(石床庵)에 도착했다. 절 옆으로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인 석상암은 법당과 칠성각만 남아있는 작고 아담한 절이다. 법당 뒤로 붉은 단풍을 병풍마냥 둘러 소담하고 아름답다. 석상암을 나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색색이 물든 단풍을 눈에 담다 보니 웬만해선 성에 차지 않는다. 가을이, 단풍이 걸음을 붙잡아 짧은 거리가 무척 더디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으나 단풍이 가로막아 자꾸 시간을 붙잡았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수리봉에 오르다


마이재에 도착했다. 선운사 입구 담장을 끼고 출발해 1.4㎞를 올랐다. 40분이면 충분히 오를 곳을 한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색색이 물든 단풍에 마음을 뺏겨 하염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다. 마이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경수산이고 좌로 오르면 주봉인 선운산 수리봉(336m)이다. 독수리 모양의 형상이라서 수리봉인 이곳은 도솔산이라고도 한다. 산에서 왼쪽으로 눈을 두면 선운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언뜻언뜻하던 선운사가 발아래 가깝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곰소만과 멀리 변산반도를 내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맑을 때면 멀리 칠산 앞바다가 눈에 잡힐 듯 다가오겠지만 오늘은 가깝지가 않다. 옅은 안개에 가려 저만큼 멀어졌다. 

돌담을 끼고 석상암 오르는 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참당암

수리봉에서 포갠바위를 지나 참당암(懺堂庵)을 향했다. 참당암에 다가설수록 단풍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마이재를 향하던 단풍이 수리봉을 넘어 이곳 참당암까지 따라왔다. 선운사 암자 중 가장 오래된 암자로 본디 대참사(大懺寺)라는 큰 절이었는데 지금은 선운사의 산내암자가 됐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다니며 들렀던 곳이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 부속건물도 늘고 더 넓어져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다. 참당암을 지나 연천마을, 심원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보은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검단선사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매년 자신들이 만든 소금을 검단선사에게 시주했다 해서 보은길이다. 지금도 매년 행사를 진행하며 보은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참당암 가는 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도솔암 마애불 미소를 보다

소리재를 지나 용문굴을 지나쳐 낙조대와 천마봉으로 향했다. 천마봉을 먼저 보고 다시 돌아와 용문굴을 보기로 했다. 천마봉에서 바라보는 도솔암과 내원궁, 몽실몽실 구름이 이는 것처럼 피어오른 거대한 바위들은 마치 산수화를 그린 것같이 아름답다. 마애불의 미소가 여기서도 보이는 듯하여 벌써부터 몸이 바쁘다. 길을 되돌아 용문굴로 향했다. 검단선사에게 쫓겨난 못된 용이 큰 바위를 뚫고 도망갔다 하여 용문굴이다. 예전부터 전설에 용문굴 벽이나 천정 구멍에 돌을 던져 넣으면 처녀총각은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한 사람은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어린 나는 상관도 없이 그렇게 돌을 던졌다. 용문굴 반대편엔 햇빛과 단풍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름답다. 선운사 단풍 중 용문굴에서 도솔암까지의 단풍은 내가 본 단풍 중 가장 아름답다. 형형색색 단풍은 절벽을 물들이며 그렇게 도솔암 마애불 앞에 도착했다. 서산에 지는 해가 마애불을 비춘다. 마애불은 만면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마애불 옆 108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내원궁이다. 영험하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이 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다보니 항상 붐빈다. 

도솔천./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붉게 물든 도솔천에 가을을 실려보내다

도솔암을 지나 처음 출발했던 선운사로 향했다. 도솔천 위로 숱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나무들은 온몸으로 가을을 받아내고 있었다. 도솔천은 제 모습을 다하고 떨어져 내린 이파리를 보듬고 아래로 자꾸 흘러간다. 낙엽이 지나치다가 물에 비친 나무에 걸리면 또다시 단풍으로 잠시 살아났다 흘러간다. 개중 한 잎은 작은 소용돌이를 만나 자꾸 제자리걸음이다. 도솔천을 따라 줄느런한 나무 가득한 단풍에 물색도 붉게 물들었다. 수많은 추객(秋客)은 단풍에 취해 여러 포즈로 구애를 하나 단풍보다 예쁘지 않다. 가을은 이렇게 선운산을 물들이고 세상을 형형색색 물들이며 흘러간다. 

단풍 - 피천득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ㅣ머니S 2018.11.22

/ 2022.03.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