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삶을 되새김하는 '자작나무숲 인생길' (2022.03.15)

푸레택 2022. 3. 15. 09:04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삶을 되새김하는 '자작나무숲 인생길' (daum.net)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삶을 되새김하는 '자작나무숲 인생길'

단풍 갈아입는 '인생의 길'한반도 닮은꼴 자작나무 군락서 살아온 삶 되새김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숲.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이른 아침 얕은 산 언저리에 걸터앉았던 안개가 점점 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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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숲.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삶을 되새김하는 '자작나무숲 인생길' 

단풍 갈아입는 '인생의 길'
한반도 닮은꼴 자작나무 군락서 살아온 삶 되새김


이른 아침 얕은 산 언저리에 걸터앉았던 안개가 점점 옅어지다 아침 햇살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안개가 걷히자 하늘이 너무 청명해 눈이 시리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반팔이 서늘해 옷깃을 자꾸 여민다. 가을이다.

서울에서 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홍천IC에서 인제 방면으로 길을 꺾는다. 이어 신남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양구방면으로 진입한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 좀 더 내려가면 수산리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데로 좌회전해 6㎞를 더 구불구불 돌아 들어간다.

수산리 자작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는 소양호를 끼고 한참을 달려야 한다. 이렇게 신남교차로에서 이십여분을 달려가면 수산리 자작나무 숲길 입구인 인제 자연학교캠핑장이 나온다. 캠핑장 앞 수산천 위로 단풍 그늘이 화려하다. 앞으로 걷게 될 길에 기대가 커진다.

◆ 발품 팔아야 만나는 자작나무숲길 

자작나무숲으로 향하는 길, 길동무는 풍경보다 정겹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캠핑장을 지나 길을 따라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자작나무를 만나기 위해선 발품을 팔아야 한다. 여의도 두배 넓이의 숲길과 임도를 따라 걷는 자작나무숲길은 수산리 임도 11㎞를 걷는 코스다. 자작나무 산책로까지 더한다면 길은 멀어지지만 더 멋진 자작나무숲을 볼 수 있다.

아직 채 물들지 않은 잎들은 조금씩 늦가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나마 참지 못하고 붉게 물든 이파리 덕분에 가을을 맛봤다. 인가는 듬성듬성 나그네를 반긴다. 길 옆 수산천을 따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맑게 흐르는 물줄기는 투명한 물그림자로 눈을 어지럽힌다. 팽그르르 물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낙엽 하나가 자꾸 제자리를 맴돌며 눈길을 잡는다.

수산천과 함께 1㎞를 진행하면 길이 나뉜다. 우측 길은 임도를 한바퀴 돌아 나오는 하산길로 잡았기에 좌측으로 계속 진행한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가을의 짙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볍다. 도반(道伴)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 즐겁다.

설레설레 1㎞를 지나니 조그마한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자 별장 앞 갈림길이다. 보통은 좌측방향 오토캠핑장 쪽으로 길을 잡지만 가장 무성한 자작나무 숲을 눈앞에서 보기 위해 우측으로 들어섰다. 나중에 가게 될 자작나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자작나무 군락이 바로 지금 1㎞ 남짓 들어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큰 나무 옆에 잔뜩 녹슨 양철지붕이 반긴다. 많은 전설이 생겨날 것만 같다. 길은 실처럼 산 안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길은 산에서 내려온 물에 토막 나면서도 계속 이어져 몇번이고 물을 건넜다.

순백의 자작나무숲.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순백(純白)의 세계다. 온산 가득한 자작나무, 마치 목책을 두른 듯 산허리를 감싸고 돈다. 남쪽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북방에만 사는 눈을 닮은 자작나무. 하얀 수피는 글 쓰는 노트가 되고 화가에게는 도화지가 되고, 길을 걷는 이에게는 길동무가 되기도 한다. 기름을 머금은 나무는 워낙 불이 잘 붙어 타는 소리가 자작자작 해서 자작나무라 했다던가. 제 한 몸 타올라 따뜻하게 덥혀주는 소신공양을 하니 참 고마운 일이다.

◆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와 자작나무 군락

인제 생태학교 인근의 단풍 풍광.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자작나무 군락을 살펴보고는 다시 갈림길로 돌아섰다. 오토캠핑장을 지나 참막골에 들어서니 둘레를 가득 덮은 400년 된 복자기나무 한그루가 커다란 품을 환히 열고 반긴다. 아직 가을이 여물지 않아 맨 위만 붉게 물들어 마치 장닭의 벼슬처럼 보인다. 2년 전에 봤을 때는 붉다 못해 핏빛으로 보일 정도였는데 아직 가을이 영글지 않았음이 여실하다. 보름 정도 지나면 홍시처럼 붉게 영글겠다. 한동안 마음이 붉어져 복자기나무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이었다.

창막골 임도 삼거리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길을 헤맨다. 왼쪽으로 가면 빙골임도와 어론리 임도로 빠져나가는 길이다. 한반도 전망을 보고 원점회귀로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한반도 지형이 있는 전망대를 향해서 길을 재촉했다. 임도 차단막을 지나 한동안 오르막이다. 길은 시멘트 포장과 흙길이 반복됐다. 2㎞를 더 나아가 전망대에 도착했다.

수령 400년가량의 복자기나무.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 큰 숨을 내쉬니 가슴이 후련하다. 멀리 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 군락은 형체가 있으나 노랗게 익지 않아 아직은 옅게 보인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색은 더 선명해지겠다. 몇시간이고 내달리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북방의 자작나무 전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은 벌써 대륙을 내달린다.

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숲에서 통일을 기원하는, 나무 심은 이의 염원을 본다. 러시아인들은 자작나무를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 여겼다. 그러기에 자작나무숲에는 인간의 영혼이 함께 살고 있어 하얀 수피에다 소원을 쓰면 이뤄진다고 믿었다. 저 자작나무 한그루 한그루마다 수피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써서 이뤄진다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써보고 싶다.

◆ 다시 원점으로… 반추의 묘미

돌아오는 길의 자작자무숲.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전망대를 출발해 무학골로 향했다. 도중 보이지 않던 차들이 임도로 따라 들어온다. 임도가 막히지 않아 차를 타고도 단풍을 보기 위해 많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아직 깊이 물들지 않아서 드문드문 보이지만 10월 말쯤 온산이 깊이 물들 때면 출사객들이 가득할 것 같다.

인근의 원대리 자작나무가 20~30미터의 굵은 자작나무라면 이곳은 원대리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멀리 펼쳐져 가을색으로 물든 모습 전체를 감상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을 듯하다.

전망대에서 부지런히 걸어 매봉으로 갈라지는 임도삼거리에 도착했다. 뒤돌아서서 걸어왔던 길을 바라본다. 저렇게 멀리 보이는데 지나왔던 길이다. 좌측은 매봉으로 빠져나가는 임도다. 우측으로 직진한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가을 산 물들어가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처음 출발했던 인제생태 자연학교다.

산은 오르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임도도 마찬가지다. 앞만 바라보고 가다가 뒤도 볼 수 있는 게 트레킹의 매력이다. 언제나 자신을 반추해보며 자신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걷는 자의 기쁨’이다.

백석이 1930년대 함경도를 여행하며 쓴 시를 소개하며 자작나무숲 기행을 마친다.

'백화'(白樺)-백석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 산 너머는 평안도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ㅣ머니S 2018.10.25

/ 2022.03.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