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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④ 드라마로 왜곡된 장희빈, 사실은 악녀가 아니다? (2022.02.26)

푸레택 2022. 2. 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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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드라마로 왜곡된 장희빈, 사실은 악녀가 아니다? ④ - 월드투데이

[월드투데이 유효미 기자] 과거에는 장희빈이 악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장옥정을 악녀라고 단언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 인물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따라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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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BS]


[역사 속 인물] 드라마로 왜곡된 장희빈, 사실은 악녀가 아니다? ④ 

역사적 사료의 재검토를 통한 장희빈의 재해석, 실제 악인은 따로 있다

[월드투데이 유효미 기자] 과거에는 장희빈이 악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장옥정을 악녀라고 단언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 인물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따라 재편집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장희빈이 대표적인 예이며 신사임당도 이에 해당한다. 신사임당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신사임당 사후에 유교적 관념과 성리학적 가치에 의해 새로이 정립된 이미지다. 신사임당이 실제로 살아있던 당시, 그 어디에도 그녀가 현모양처라는 평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SBS]


시대 상황에 따라 가공된 역사 인물들의 이미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여성 인물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특정 가치와 연관되어 시대 상황에 맞게 가공되어 갔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희생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인물이 지니고 있는 특정 이미지의 정당성을 검토해야 하며, 이에 따라 장희빈에 대해서도 재해석이 필요하다. 일단 지금의 장희빈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사료는 바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작자미상의 '인현왕후전' 두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을 보면 두 집필자가 인현왕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죽는 그 순간까지 발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숙종실록'에는 이 같은 언급이 일절 없다. 

 

[사진=숙종실록의 숙종 15년 1월 15일 계미 3번째 기사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다', 국사편찬위원회]


'숙종실록'에서 장희빈의 장례는 정상적으로 예를 갖춰 진행됐으며, 장례에 아들인 세자가 참여했다고 집필되어 있다. 또한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이 장희빈에게 자결 명령을 내릴 때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라 부득이한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일 수 있지만 어쩌면 숙종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장희빈에게 자결을 명한 것이 아니라 신권에 굴복당해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사료라도 그 집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해 천차만별의 평가가 내려진다. 그리고 이에 관한 해석도 사람 또는 시대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역사적 사료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엄정한 사료 비판을 거쳐야만 한다. 

[사진=SBS]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던 장희빈

장희빈과 관련한 기존 사료를 토대로 그녀의 삶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면, 장희빈의 삶엔 늘 당파의 싸움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교대는 남인과 서인의 교대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환국과 왕비의 교체라는 두 가지 사실의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져봐야 하는데, 흔히들 사극에서는 왕비의 교체에 따라 환국이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해왔다. 즉,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들이 움직이게 하는 존재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장희빈을 악녀가 아닌 서인과 남인의 정치싸움에 휘말린 희생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어쩌면 장희빈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장희빈의 집안은 가난한 편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당쟁의 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끝내 이용당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이제는 악녀 장희빈이 아닌 붕당정치에 희생당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여인 장옥정으로 기억해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마지막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도 사람들이 위와 같은 장옥정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이같이 지었던 것 같다. 
 

[사진=SBS]


실제 악인은 따로 있다

지금까지 여러 편에 걸쳐 장희빈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면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희빈을 그렇게 만든 배경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거행되어야 한다. 앞서 장희빈은 붕당정치의 희생양이라고 언급하였다. 특히 장희빈이 살아있던 당시의 조선은 붕당정치가 활발하게 전개된 때이기도 하였다. 당시 권력 다툼의 주체는 주로 남성이었다. 권력을 얻기 위한 욕심이 붕당정치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이용하였다.

엄정한 사료 비판의 중요성

어쩌면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그들이 새로운 악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누구도 악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이 시리즈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는 섣불리 역사 인물에게 어떠한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마다 각자의 해석이 있고 시대 상황에 따라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평가는 평가일 뿐이고 프레임은 논외 사항이다. 이미지의 고착화는 생각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엄정한 사료 비판과 시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로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갖는다면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건설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건전한 역사적 논쟁 속에서 더 가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역사의 순기능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출처 WORLDTODAY 2022.02.22

/ 2022.02.2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