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분꽃, 해오라기난초, 족두리꽃, 여우오줌, 미스킴라일락

푸레택 2022. 1. 29. 12:32

[풀꽃이름] 분꽃 / 임소영

흔히 나오는 사극이나 '스캔들, 황진이' 등의 영화를 보면 옛날 여인들이 어떻게 꾸미고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분꽃'은 가루를 뜻하는 분(粉)과 꽃이 합친 말로, 까만 분꽃씨앗에 들어 있는 '가루'를 화장할 때 썼다고 붙은 이름이다. 분꽃씨 가루는 기미·주근깨·여드름을 치료하는 데 쓰기도 하였다. 마당가에 분꽃을 길러본 사람은 분꽃귀고리를 해 봤던 추억도 있으리라. 영어로는 '페루의 놀라움'(marvel of Peru)이나 '네 시'(four-o'clock) 꽃이라고도 이른다. 이 이름은 분꽃의 원산지가 열대 아메리카이고, 해질 때부터 아침까지 피는 꽃임을 알게 해 준다. 비록 좁은 발코니밖에 없더라도 화분에 씨앗을 뿌리면 아침에는 나팔꽃을 볼 수 있고, 나팔꽃이 지고 나면 다시 분꽃을 볼 수 있다. 식물의 연주를 누려보는 것은 어떠실지! 실은 분꽃이나 박꽃이 피면 저녁밥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들이 그 리듬에 맞추어 살았던 셈이다.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척박하던 시절에도 오히려 넉넉하게 화장도 하고 사랑을 꽃피우며 살았음을 까만 분꽃씨를 쪼개며 되새긴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해오라기난초 / 임소영

풀꽃이나 이를 박은 사진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날 때가 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예술품도 신의 수준을 절대 따라가지 못하나니, 어쩜 이렇게 생길 수가! 할 정도로 빛깔·모양이 멋지고 신기한 것 중에 '해오라기난초'가 있다. 활짝 핀 모습이 날개를 펴고 나는 해오라기를 닮았다. '해오라비난초'라고도 하는데, '해오라비'는 '해오라기'의 경상도 고장말이다. '해오라기'의 '해'는 '희다'와 통한다. 이는 '풀'에서 '푸르다'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해'에서 '희다'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라기'는 해오라기가 '해오리'로도 불린 것을 보면, '오리'와 연관된 말일 수 있겠다. '해오라기'를 백로(白鷺)로 일컫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백로·해오라기·왜가리는 다르다. 백로는 이 셋을 통틀어 이르며, 흔히 까마귀와 맞견주는 백로가 실은 중백로인데, 이 꽃은 해오라기보다는 중백로를 닮았다. 날아가는 해오라기보다 꽃이름이 더 멋진데, 실제로 그 모습까지 금방이라도 꽃대에서 날아오를 듯한 까닭이다. "해오라비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는 백석의 시 '늙은 갈대의 독백'처럼 동물과 식물이 소통하는 자연의 어울림을 여기서 본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족두리꽃(풍접초) / 임소영

칠월 하늘 아래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 족두리꽃을 보았다. 집 둘레에 흔하게 심는 꽃이 아니어서 지나는 이마다 임자에게 꽃이름을 물어본다. '족두리꽃'이라고 하니, 애써 전날 여자들이 쓰던 족두리에 견준다. 그러고 보니 예저기 핀도 꽂혀 있고, 새색시 머리에 얹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모양에 크기다. 다른 야생화 '족두리풀'의 자주 꽃도 족두리를 닮아 붙인 이름인데, 그 족두리는 고상하고 얌전하게 생겼다. 북한에서는 '나비꽃'이라고 하는데, '조선말대사전'에는 분홍과 흰색의 나비 모양 꽃이 핀다고 설명한다. 역시 나비 날개와 더듬이를 떠올려 본다. 한자말로도 바람에 나는 나비 모습이라고 '풍접초'(風蝶草)라 한다. 족두리꽃은 지금 딱 칠월만큼 진하고 예쁘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 날씨는 늘 쾌적하고 이파리들은 언제나 푸르지만 잎사귀의 짙어짐을 거의 체험할 수 없는 평균적 푸름이 왠지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그래서 신록이 있고 녹음이 우거지고 처연히 단풍 드는 우리 땅이 문득 문득 그립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도 자연도 확실히 '다이나믹 코리아'임이 틀림없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여우오줌 / 임소영

여우는 이제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인데, '여우오줌'은 8∼9월에 피는 노란 꽃에서 여우 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쥐는 고양이나 여우 오줌 냄새를 천적의 냄새로 알기에 두려워한다고 하니, 쥐한테 어떤 냄새인지 물어봐야 할 판이다. 이 이름은 1489년 나온 <구급간이방언해>와 1613년 나온 <동의보감>에도 '여으오좀' 등으로 나온다. 꽃줄기와 뿌리를 배앓이나 회충 따위의 치료제로 썼다는데, 여우가 사라진 것처럼 횟배앓이도 없어졌으니 이름이나 쓰임 두루 추억이 남았다. 메마른 숲에서 자라며 '왕담배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국화과의 다른 담배풀보다 키도 크고 줄기도 굵고 잎이나 꽃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우가 들어간 다른 풀꽃도 있다. 빨간 구슬꼴 열매가 앙증맞아 '여우구슬', 복주머니 같은 동글납작한 열매가 달려 '여우주머니', 열매가 콩처럼 생겨 '여우콩'이라 한다. 옛날이야기 속의 여우가 그렇듯 이들의 공통점은 예쁘고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여우를 만나기 어려워 이런 이름이 더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나무노래 / 임소영

초등학생 조카가 읊조리는 '나무노래'는 조그만 입술로 옹알대는 모습도 귀엽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유희 수준이 뛰어나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우선 비슷한 소리를 붙인다.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 오다보니 오동나무, 늙었구나 느릅나무, 자빠졌다 잣나무…." 낱말풀이도 있다. "십리절반 오리나무, 열의갑절 스무나무, 내편네편 양편나무, 젖먹여라 수유나무, 셈잘한다 계수나무…." 말 쓰임이 나오기도 한다. "불밝혀라 등나무, 불에붙여 향나무, 마당쓸어 싸리나무…." 모습과 소리가 살아있다. "덜덜떠는 사시나무, 입맞췄다 쪽나무, 오줌싼다 쉬나무…." 반대말도 등장한다. "낮에봐도 밤나무, 거짓없어 참나무, 양반동네 상나무, 풀었어도 매자나무…." 아이러니는 어떤가. "한치라도 백자나무, 남쪽에 난 동백나무, 푸르러도 단풍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아예 한 문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앉아 구기자'나무, '칼로베어 피'나무, '씨름하여 저'나무, '하느님께 비자'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요즘 생태학교에서 "뽕나무가 뽕하고 방구를 뀌니, 대나무가 대끼놈 야단을 치네, 참나무가 참다못해 하는 말, 참아라~"처럼 배운다 하니, 삶과 자연이 하나로 녹아든 모습이다. 나무노래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4·4조 음수율에 운을 맞추고 뜻을 이루는 품새가 절묘하지 않은가.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책임연구원 / 한겨레

[풀꽃이름] 미스킴라일락 / 임소영

축제의 달 5월에 대학에서 라일락꽃 내음이 향긋하다. 젊은이들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 보며 쓰디쓴 사랑의 맛이라 음미하는 일도 이제 전통이 된 듯싶다. '라일락'과 우리 품종인 '수수꽃다리', 향기가 강하다는 뜻의 '정향'(丁香)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냥 모두 라일락이라고 한다. '미스킴라일락'은 미군정 때 미국 사람이 북한산에서 가져간 수수꽃다리 종자를 개량해 나온 품종인데,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한국의 대표 아가씨는 미스킴이던가? 혹은 미스킴의 맵씨와 향기가 묻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일락인데, 우리가 로열티를 물고 들여온다니 안타깝다. 젊은 여성을 흔히 '미스리, 미스킴'이라고 불렀던 때도 있었건만, '-씨'를 거쳐 '-님'으로 많이 바뀐 듯하다. '미스터'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결혼 표시를 떠나 인격적으로 더 존중되는 우리말 표현으로 바뀌어 기쁘다. 지난 1년6개월 '숲속 하얀 꽃부리'(林素英)라는 이름값으로 글을 실었다. 연재를 마치며, 직접 산과 들에서 풀꽃을 관찰하고 정리하는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노고, 풀꽃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에 감사드린다.

글·사진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