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쐐기풀, 노루귀, 패랭이꽃, 광대수염, 씀바귀

푸레택 2022. 1. 27. 21:33

[풀꽃이름] 쐐기풀 / 임소영

'쐐기'는 풀, 벌레, 물건 이름으로 두루 쓰인다. '쐐기풀'은 주로 숲 가장자리에 많이 자라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흔히 따끔하게 스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잎이 톱니 모양에다 포기 전체에 가시털이 나 있다. 가시에는 개미산(포름산)이 들어 있어 찔리면 쐐기한테 쏘인 것처럼 아프다. 그런데 독은 독을 이기는 법인지, 쐐기풀은 뱀독 해독제로도 쓰였다. '쐐기풀'은 모양과 감각이 두루 반영된 이름이다. '쐐기벌레'는 쐐기나방 애벌레로, 몸에 뾰족한 독침이 있어 따갑게 쏘기에 붙여진 이름일 터이다. '쐐기'는 물건을 고정시키거나 쪼갤 때 쓰는 쐐기(V)꼴 물건이다. 세계 글자 역사에서는 대체로 현존하는 최고의 문자로 기원전 4000년께 썼다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를 든다. 진흙판에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쐐기같이 뾰족한 도구로, 진흙이 일어나지 않게 쐐기 모양으로 쓸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제일 훌륭한 신랑감은 의사도 판사도 아닌 '필경사'였다고 한다. 글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지식과 권력의 최상층부인 시대도 있었는데, 최근 20년 사이 없어진 직업이 '필경사'와 '타자수'라는 얘기는 흥미롭다. '서예'는 말 그대로 미술 영역이 되었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한겨레]

[풀꽃이름] 노루귀 / 임소영

입춘에 우수까지 지나니 방송이나 잡지에서 봄을 알리는 들꽃 사진을 많이 보여준다. 산과 들에 사진 찍으러 가도 실제로는 찾기 어렵다고 하는데, 눈속에서도 피어 있는 풀꽃을 찾아내고는 강한 생명력을 느끼고서 그 새롭고 소중함을 전하는 듯하다. 산수유·매화·개나리·진달래·벚꽃이 차례로 온 나라를 덮기 전에 봄의 전령으로 수줍게 피는 바람꽃·복수초·현호색·노루귀·제비꽃 …. 이 가운데 노루귀는 신문·방송에서도 여러 번 보았다. 노루가 예전에는 아주 친근한 동물이어서 그런지, 땅이름·연장이름·속담들에도 자주 등장한다. 풀꽃이름에는 더 흔하다. '노루귀'는 노루귀 모양의 잎 뒷면에 털이 보송보송 길게 덮은 모습이 노루귀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조금 작은 노루귀는 '새끼노루귀'라 부른다. '노루발'은 잎맥 모양이나 하얀 눈 위에 나 있는 모습이 노루 발자국처럼 보인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작은 품종은 '새끼노루발'이다. '노루삼'은 홍갈색 수염뿌리가 나고 약효가 많은 까닭에, '노루오줌'은 노루가 물 마시고 오줌 누는 물가에 많고, 노루오줌 냄새가 난대서 붙은 이름이다. '노루참나물'은 참나물과 비슷하나 전체에 털이 나서, '노루궁뎅이버섯'(노루꼬댕이버섯)은 노루꼬리 모양의 털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노루귀든 노루궁뎅이든 지금은 잘 볼 수 없으니, 노루가 뛰놀고 노루귀가 피었던 산골의 봄을 머릿속으로나 상상해 본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패랭이꽃 / 임소영

'패랭이꽃'은 길가 풀밭이나 냇가 모래땅, 묏자리 근처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꽃을 뒤집으면 옛날에 역졸, 부보상들이 쓰던 패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자어로는 석죽(石竹)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위틈 같은 메마른 곳에서도 잘 자라고, 대나무처럼 줄기에 마디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패랭이꽃은 우리나라가 원산지여서 자라는 곳이나 모양에 따라 이름도 많다. 바닷가에 자라는 '갯패랭이꽃', 구름이 떠 있는 높은 산에서 자라는 '구름패랭이꽃', 백두산에서 자라는 키가 작은 '난장이패랭이꽃',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패랭이꽃', 꽃잎이 붉은 '각시패랭이꽃', 꽃잎이 술처럼 잘게 갈라진 '술패랭이꽃', 꽃받침을 둘러싼 부분이 수염처럼 생긴 '수염패랭이꽃' 들이 있다. '패랭이꽃' 이름에서는 거추장스럽거나 거들먹거리지 않는 실용적인 모자를 쓰고, 바지런하게 생활하던 옛사람의 일상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옛날 우리의 생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풀꽃이름으로는 '달구지풀/ 작두콩/ 병풍나물/ 삿갓나물/ 요강나물/ 족두리풀/ 비녀골풀/ 투구꽃/ 갈퀴나물 …' 들이 있다. 화려하지 않고 평범하며, 귀하지 않고 뽐내지 않아 친근함을 느껴서 그런지 소박한 삶과 마음을 패랭이꽃과 함께 쓴 글이 많다.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이라는 류시화의 최근 시(패랭이꽃)를 되뇌어본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광대수염 / 임소영

탈놀이·줄타기·땅재주·판소리 등 연예를 하는 예능인을 통틀어 이르던 우리말에 '광대'가 있다. 요즘은 재주가 많은 연예인들이 대접받는 시대지만, 직업에서 귀천의식이 드셌던 옛날에 광대는 천한 존재로 여겼다. 동식물에 광대라는 말이 붙으면서도 이런 의식이 작용해서 그 실체도 대체로 울긋불긋하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인다. 동물에는 '광대노린재/ 광대박쥐/ 광대파리/ 광대하늘소 …'들이 있고, 식물이름에서는 '광대나물/ 광대싸리/ 광대버섯 …'들이 있다. '광대수염'은 꽃잎의 알록달록한 점이 광대를, 꽃받침의 가장자리에 뾰족한 가시가 수염을 연상시켜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점도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않고, 수염이라고 떠올린 부분도 삐죽삐죽하여 점잖은 모습이 아니다. 북녘말로는 '꽃수염풀'이다. 사람 모습이나 신분에서 따온 풀꽃이름으로는 이 밖에도 '양반풀/ 각시꽃/ 기생초/ 할미꽃/ 처녀치마/ 선녀고사리/ 미치광이풀/ 바보여뀌 …'들이 있다. 우리는 어린순을 나물로 먹기도 하는데, 영국 방송 〈비비시〉(BBC)가 만든 '식물의 사생활'을 보면, 광대수염은 가시에 침과 독물이 있는 유럽쐐기풀과 비슷한데, 동물들은 먹지 않는다고 하니 그 생존본능도 신기하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광대의 삶을 새롭게 보고, 진심으로 예인으로 인정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얼룩덜룩하고 우스우면서도 가끔씩 슬프기도 한 삶에서 누군들 광대 아닌 사람이 있으랴!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씀바귀 / 임소영

봄나물이 한창이다. 씀바귀는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 오자 ~'라는 노랫말에서도 보듯 봄에 나는 대표적인 나물이다. 농가월령가 2월령에도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 달래김치 냉잇국은 입맛을 돋우나니 …" 하는 구절이 나온다. 씀바귀는 잎새와 뿌리에서 나오는 하얀 즙이 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 '씸배나물/ 씬나물', 한자말로 '고채'(苦菜)도 마찬가지 뜻이다. 들과 산에 흔한 씀바귀는 '흰씀바귀/ 꽃씀바귀/ 산씀바귀/ 모래씀바귀/ 벋음씀바귀 …'들처럼 종류도 많다. 씀바귀는 입맛을 돋우고, 춘곤증을 이겨낼 수 있으며, 봄에 씀바귀를 먹으면 여름을 타지 않는다고 한다. 예부터 내려오는 '나물노래'도 재미있다. "한푼두푼 돈나물, 쑥쑥뽑아 나싱개(냉이), 잡아뜯어 꽃따지, 영꾸부정 활나물, 매끈매끈 기름나물, 칭칭감아 감돌래, 이산저산 번개나물, 머리끝에 댕기나물, 뱅뱅도는 돌개나물, 말라죽기냐 고사리 …." 아흔아홉 가지 나물노래를 부를 줄 알면 삼년 가뭄도 이겨낸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나물은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먹거리였는데, 지금은 배부른 '웰빙'의 방편으로나 나물을 대한다. 요즘 지구가 더워진다는 온난화 걱정을 많이 한다. 소만(小滿: 음력 4월)에야 씀바귀가 뻗어 나오고,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보리가 익는 절기라고 하였는데, 그런 걱정의 징표인지 요즘은 그보다 훨씬 일찍 씀바귀가 나오고 있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