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별꽃, 달개비, 개불알꽃, 개양귀비, 꽃다지

푸레택 2022. 1. 27. 21:27

[풀꽃이름] 별꽃 / 임소영

길가나 꽃밭에 흔히 피는 꽃 중에 '별꽃'이 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꽃인데, 영어로도 '병아리풀'(chickweed) 정도의 미미한 이름이다. 꽃잎이 다섯 장인데, 한 장이 두 갈래로 깊이 갈라져 있어 마치 열 장처럼 보여서 반짝이는 별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작은 꽃들이 마치 자그마한 별들이 땅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별꽃'이라 부른다. 개별꽃도 있고, 왕별꽃도 있고, 애기별꽃도 있지만 그냥 '별꽃'이 가장 별을 닮았다. '이름 모를 풀'은 있어도 '이름 없는 풀'은 없다고 하는데, 풀꽃이름 중에는 '해'(해바라기)도 있고, '달'(달맞이꽃)도 있고, '별'(별꽃)도 있으니, 참으로 우주적(?)이다. 그러나 우리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해바라기를 'sunflower/향일규(向日葵)', 달맞이꽃을 'sundrops'라 부르고, 별꽃의 학명이 라틴어 별(stellaria)에서 유래한 것은 인류 공통의 인지구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풀꽃이름은 비록 짧지만, 인류 공통의 인지구조가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을 같은 원형인 우리의 '콩쥐 팥쥐'와 서양의 '신데렐라'에서 볼 수 있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한겨레]

[풀꽃이름] 달개비 / 임소영

어렸을 때 '달개비'는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풀꽃이었다. 너무 흔해서 보지 않을 수 없던 꽃 달개비는 주로 마당가 닭장 근처 같은 데서 자란다. 그래서 이름도 무척 많다. '닭의장풀/ 닭의밑씻개/ 닭개비/ 닭의꼬꼬'와 같이 닭과 관련된 이름에다 고장에 따라 '달구씨깨비/ 고낭귀/ 고냉이풀/ 고니풀' 같은 사투리가 있다. 어떤 이는 꽃모양이 닭 머리를 닮았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한자말 '압척초'(鴨척草)는 '오리발바닥풀', 영어이름 '구스 글래스'(goose grass)는 '거위풀'이라는 뜻이니, 집에서 치는 날짐승의 종류로도 나라나 겨레마다 다른 생활상이 드러난다. 하긴 우리 겨레한테 닭만큼 친밀한 날짐승이 어디 있으랴. 닭을 풀꽃 이름에 붙인 다른 보기로는 맨드라미의 고장말인 '달구베슬/ 닭비슬'도 있고, '닭의덩굴/ 닭의비짜루'도 있다. 달개비는 남보라색의 꽃이 대부분이라서, 빛깔에 따라 '하얀달개비/ 자주달개비'로 달리 부른다. 꽃이 큰 품종은 예전에 하늘색 물감을 만들어 썼다. 하루면 시들어 버려서 또 다른 영어이름은 하루만 피는 꽃이라는 데이플라워(day-flower)고, 그런 연유로 꽃말은 '짧았던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닭장은 멀어지고, 달개비는 과학실험실에서 잎의 숨구멍을 보는 실습재료나, 꽃집에서 사다 기르는 관상용 화분으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 어느곳 카페 이름 '달개비'도 재미있던데, 흙마당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흙물이 튀는 달개비 꽃잎을 다시 보고 싶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개불알꽃 / 임소영

풀꽃이름 가운데서 사람들이 그런 풀이 정말 있을까 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 '개불알꽃'이 있다. 이름은 거칠지만, 실제 모습은 붉은 보랏빛 예쁜 야생란이다. 개불알꽃은 꽃 모양이 마치 음낭처럼 생긴 데서 유래하는데, 사람 것에다 붙이기는 그렇고, 아마 가장 친숙한 개를 들먹인 것 같다. 주머니같이 생긴 것은 마찬가지니, 좀 점잖게 '복주머니난'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도 있지만, 민중에서 일컫는 이름은 역시 개불알꽃이다. 개불알꽃은 풀 전체에서 지린내가 나서 '요강꽃'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양과 냄새를 두루 고려한 본보기가 될 만한 이름이다. 경상도에서는 '까마귀오줌통'이라고도 부른다. 영어 이름은 '아가씨 슬리퍼'(lady's slipper), '모카신 꽃'(moccasin flower), 별명은 '노아의 방주'(Noah's ark)인데, 우리는 불알로 인지한 것을 서양에서는 신발 또는 최소한의 물건을 넣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개불알풀'도 있는데, 이는 '개불알꽃'과는 전혀 다르다. 봄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와 같다고 하여 '봄까치꽃'으로도 부르는, 푸른 보라색을 띤 어여쁜 야생화다. 개불알풀은 꽃 모양이 아닌, 열매 모양이 개 불알과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고, 한자말로는 '땅비단'(地錦)이다. 입에 담기 민망할지라도 인지한 그대로를 용기있게 '개불알'로 표현한 것은 '복주머니'보다 '땅비단'보다 훨씬 담백한 느낌을 준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개양귀비 / 임소영

우리나라에서 예쁜 여자를 비유할 때 가장 많이 들먹이는 인물이 양귀비일 듯싶다. 그래서 양귀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라 하여 꽃이름도 '양귀비'라고 붙였다. 다른 이름은 '아편꽃'이다. 양귀비와 같게 생겼으나 그보다 작고 가냘픈 꽃으로 '개양귀비'가 있다. 양귀비보다 작은 까닭에 '애기아편꽃', 우미인의 무덤에 피었다는 고사가 있어 한자말로는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부른다. '개양귀비'는 양귀비보다는 좀 못한 꽃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담긴 이름이다. 곧, '개-'라는 앞가지가 붙어 양귀비와 우미인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한자어를 쓰는 사람들의 생각 구조 속에는 비록 같은 시대의 인물이 아닐지라도, 당나라 현종의 비 양귀비가 초나라 항우의 애첩 우미인보다 더 뛰어나다는 인지 층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가지 '개-'는 대체로 본디식물(원형)에 견주어볼 때 "모양이나 품질이 조금 떨어지는" 것에 붙여 쓴다. '개나리·개머루·개동백·개여뀌·개연꽃·개싱아 …'들이 이러한 쓰임이다. 최근에 출간된 이수광의 《한국 역사의 미인》이라는 책을 보면, 황진이를 절세미인으로 치고 있는 듯하다. 중국 4대 미인과 고사는 줄줄 꿰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나오는 미인은 대부분 생소하게 여기게 된 풍토도 그러려니와, '황진이' 같은 우리 역사의 빼어난 여인 이름을 딴 꽃이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이 더 예뻐야겠지만….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꽃다지 / 임소영

요즘 가수이름은 어렵기도 하다. 그리고 에쵸티(H.O.T)를 '핫'으로 말했다거나, SS501을 '에스에스오백일'로 읽었다는 것은 얘깃거리가 될 지경이다. SG워너비는 '사이먼과 가펑클처럼 되고 싶어!'라는 것을 아는 정도가 요즘의 상식이라니 알만하지 않은가. 우리말 가수이름으로 노동가요나 민중가요를 주로 부르는 '꽃다지'라는 노래패가 있는데, 이 꽃다지의 뜻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꽃다지'는 3월에서 6월 사이에 양지바른 들이나 산에 피는 노란색 작은 풀꽃의 이름이다. 꽃대마다 작은 꽃들이 정말 '닥지닥지' 붙어서 피는데, 이 때문에 꽃다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역시 다닥다닥 피는 흰색 냉이꽃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잎과 열매 모양이 다르다. 냉이와 함께 무쳐먹기도 하고 향긋한 맛이 나 국을 끓여먹기도 하는데, 꽃다지와 소리가 비슷하고 오밀조밀 작은 꽃모양으로 말미암아 '코딱지나물'이라는 별명도 있다. 풀꽃이름이 아닌 '꽃다지'는 오이·가지·참외·호박 따위에서 맨 처음에 열린 열매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는 꽃을 닫는다는 뜻의 '꽃+닫+이'(〉다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때 신기해서 꽃다지를 따 보다가 혼난 기억이 있다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예쁜 우리말 꽃이름으로는 코스모스의 우리말 이름 '살살이꽃', 라일락의 일종인 '수수꽃다리', 소리만 들어도 예쁜 '구슬댕댕이'들이 있는데, 널리 살려 쓰고 싶은 이름들이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